시리우스와 피터의 목소리가 멀어지면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제임스는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베개에 파묻고 이불을 얼굴 위로 끌어올렸다. 간밤에 리무스와 이야기를 나눈 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새벽녘에야 잠든 탓에 비몽사몽이었다. 다시 잠의 세계로 빠져들며 제임스는 짧게 웅얼거렸다.
"이게 다 네 탓이라구, 패드풋."
다행히 일요일이라 제임스는 오후까지 푹 잘 수 있었다. 한결 가뿐해진 몸으로 침대에서 빠져 나와 기지개를 쭉 켜는데 리무스가 들어왔다. 손에는 샌드위치와 호박주스, 사과가 담긴 쟁반을 들고 있었다.
"푹 잤어? 벌써 점심시간도 지났어. 일단 이거라도 먹어."
리무스는 쟁반을 방 한쪽에 있는 탁자에 올려놓았다. 제임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오, 무니, 상냥한 무니! 역시 날 챙겨주는 건 너뿐이야."
"피터가 들으면 섭섭할걸. 평소에 널 제일 열심히 깨워주는데."
"웜테일이 신기하게 벌떡벌떡 잘 일어난단 말이지. 나랑 패드풋은 머리에 찬물이라도 쏟아붓지 않으면 못 일어나고 말야."
시리우스의 이름이 나오자 리무스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제임스가 호박주스와 샌드위치를 양손에 들고 연거푸 입으로 가져가는 동안 리무스는 자기 침대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제임스, 밤에 내가 한 얘기 말인데... 그건 순전히 내 짐작이니까 시리우스에게는 얘기하지 않는 게 좋겠어. 더구나 그 사건 얘기는 다시 꺼내고 싶지 않으니까... 난 내 나름대로 시리우스랑 다시 자연스러운 사이가 되도록 노력해볼게. 괜히 너희까지 불편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제임스는 호박주스를 꿀꺽 삼키며 눈을 빙글 굴렸다.
"미안할 거 없으니 이제 미안하다는 말은 그만해. 패드풋이 그냥 네가 남자를 좋아하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라면 그건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지. 자기 가족이나 순수혈통 타령, 슬리데린 아니고선 편견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야, 내가 보기엔. 일단 너무 신경쓰지 말고 펜위크랑 데이트나 즐겨. 그러고 보니 일요일 오훈데 둘이 안 만나고 내 식사 챙겨주러 온 거야, 지금?"
"도서관에서 이따 만나기로 했어. 감시라도 하러 올 생각이면 거기로 와."
"데이트마저 도서관이라니 래번클로답다. 펜위크랑은 적당히 하고 그리핀도르로 눈을 돌리라구, 무니. 마침 오늘 할 일도 없으니 너랑 사귈만큼 괜찮은 녀석이 있는지나 한 번 살펴봐야겠다."
리무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발 참아줘. 사실 로버트랑 사귀기로 한 것도 쉽지 않았어. 시작부터 상대를 속이는 거니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면 절대 만나지 않았을테니. 네가 걱정하는 것처럼 진도 나갈 일도 없을 거야. 서로 깊이 빠지기 전에 적당히 만나고 적당히 끝내고......"
"그건 네 생각이지. 펜위크는 너한테 완전히 반한 눈치던데. 널 보는 눈빛이 이글거리는 게......"
앞으로 다가와 눈썹을 찡긋거리는 제임스의 얼굴을 향해 리무스가 베개 던지는 시늉을 했다.
"걔 눈이 원래 커서 그래. 그리고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지 마. 아침식사 때 만났는데 네 시선이 안 느껴지니 마음이 편안하다고 하더라."
"훗, 제임스 아빠의 감시망을 벗어날 순 없으니 너무 안심하지 말라고 해. 그럼 난 씻고 내려갈테니 즐거운 데이트하고 있어."
"그래. 나도 옷 갈아입고 나가야겠다. 점심에 주스를 흘려서 소매가 끈적거리네."
리무스가 돌아서서 하얀 셔츠와 푸른색 스웨터를 꺼냈다. 리무스의 옷이 다 그렇듯 약간 낡았지만 주름 하나,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하고 단정한 옷이었다. 입고 있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푸는 리무스를 보며 제임스가 농담을 던졌다.
"펜위크는 우리가 부러워 죽을걸. 네가 자는 거나 옷 갈아입는 걸 매일 볼 수 있으니. 셔츠 단추는 두 개 이상 풀면 안돼, 무니. 아까도 말했지만 펜위크 눈빛이 불타오른단 말이지. 과한 노출은 금지야."
"맙소사, 제임스. 난 로버트보다 네 눈빛이 더 걱정이야."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시리우스가 들어왔다. 몸에 살짝 붙는 셔츠와 바지 덕분에 잘 빠진 근육질의 몸이 한층 더 돋보였다. 아침부터 여자애들 눈호강했겠네, 제임스는 절친의 심하게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시리우스의 눈이 제임스와 마주쳤다 돌아서서 셔츠를 벗고 있는 리무스에게로 향했다. 입꼬리를 올리며 웃으려던 얼굴이 갑자기 눈에 띄게 딱딱해졌다. 새 셔츠를 어깨에 걸친 리무스가 시리우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리우스는 문간에 굳은 듯이 서서 리무스를 바라보았고 리무스는 잠시 시리우스의 표정을 살피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 급한 손길로 셔츠 단추를 채웠다. 제임스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방안 분위기는 누가 봐도 이상하다 싶을 만큼 어색해졌다. 제임스는 괜히 흠흠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어이, 패드풋. 의리없게 빈손으로 올라온 거야? 내 식사는?"
그제서야 시리우스의 눈이 제임스에게로 향하면서 표정이 누그러졌다.
"리무스가 샌드위치 챙겨서 올라온 거 알거든. 무슨 식사를 또 하려고 들어?"
"그 정도론 이 멋진 몸을 유지하기 힘들다구. 씻고 주방에 살짝 들러서 집요정들한테 부탁 좀 해볼 생각이야. 같이 갈래?"
"난 배불러서. 피터랑 같이 가. 휴게실에서 프랭크랑 체스하고 있는데 금방 끝날 거야."
시리우스의 눈이 다시 리무스에게로 향했다. 리무스는 스웨터를 다 입은 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빗어내리고 있었다. 옷을 급히 입어서인지 하얀 볼이 살짝 붉어진 게 보였다.
"대낮에 옷 갈아입는 거 보니 데이트 가는 모양이네."
시리우스의 목소리는 차갑지도 그렇다고 상냥하지도 않았다. 왠지 무심하려고 애쓰는 듯한 목소리여서 제임스는 주의깊게 귀를 기울였다.
"응... 그럼 다들 저녁식사 때 보자. 난 도서관에 볼일이 있어서......"
리무스는 침대 옆에 쌓아둔 책 몇 권을 집어들고 뒤도 보지 않고 빠르게 나가버렸다. 무슨 책을 들고 가는 건지 알기나 하는 걸까, 제임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시리우스랑 있으면 리무스가 엄청나게 긴장한다는 걸 방금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시리우스, 너 무슨 문제있어?"
"무슨 소리야, 갑자기?"
"너 말이야, 리무스가 펜위크랑 사귀는 게 싫어? 둘이 사귄다는 얘기 나온 이후부터 네 반응이 영 탐탁치 않으니 하는 소리야."
"내가 좋다 싫다 할 일이 아니지. 리무스가 누굴 만나건 내가 참견할 문제가 아니잖아."
시리우스는 자기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워 팔로 눈을 가렸다.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몸짓이었지만 제임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럼 무니한테 계속 쌀쌀맞게 구는 이유가 뭐야? 학기초부터 분위기가 이상하다 했지만 이 정도까진 아니었어. 근데 펜위크랑 사귄다고 얘기한 이후로 너 무니한테 엄청 어색하고 뻣뻣하게 군다구. 아니라고 발뺌만 하지 말고 시원하게 얘기해."
시리우스는 끙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문질렀다. 손바닥 아래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어 제임스는 시리우스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당겼다. 눈을 꽉 감고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얼굴이 드러났다.
"제대로 말해. 뭐라고 하는 거야?"
"그냥......그냥 그렇다고. 나도 모르게 그렇게 하게 돼. 이제 궁금증이 풀렸어?"
"그딴 걸 대답이라고 하냐? 똑바로 말해. 너 리무스가 남자를 좋아하는 게 싫은 거야?"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마. 내가 아무리 형편없는 놈이어도 그렇게 모순된 인간은 아니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