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하는 생각은 했지만 막상 리무스의 입에서 시리우스를 좋아했다는 말이 나오자 제임스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리무스의 무릎에 기댔던 머리를 천천히 들어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옅은 갈색머리에 반쯤 가려진 리무스의 뺨이 붉게 물든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무니, 네 말은... 네 첫사랑이 시리우스란 뜻이야?"
리무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 제임스의 어깨를 문지르던 손으로 자신의 바지 무릎천을 초조한 듯 잡아당겼다.
"절대 시리우스에겐 말하지 말아줘. 내가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걸 알면 지금처럼 지내는 건 기대할 수 없을 거야. 로버트랑 사귀고 지난 몇 주 동안 느낀 거리감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웠는데... 아마 날 진심으로 경멸하게 될지도 몰라."
"무니,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패드풋은 널 경멸한 적이 없어. 네가 게이라서 그렇게 대한 게 아니라고 나한테 분명히 말했어."
이 말에 리무스가 몸을 반쯤 돌려 제임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럼 왜 그렇게 행동한 건지 진짜 이유를 얘기했어?"
"그건......"
시리우스가 실은 너를 좋아한다고 직설적으로 얘기하고 싶었지만 제임스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자기 입에서 꺼낼 얘기가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약 교실 청소 직전부터 물을 마시지 않아 깔깔하던 입속이 더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길게 숨을 내뱉은 제임스는 리무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 말 잘 들어봐, 무니. 거짓말은 하지 않을게. 그래. 패드풋이 왜 그렇게 굴었는지 이유를 얘기했어. 하지만 내가 중간에서 전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야. 패드풋이 네게 말할 때가 올 거야. 부디 널 경멸하거나 미워하는 거라고 오해하지 말고 패드풋에게 시간을 줘."
리무스의 시선이 다시 바지 무릎으로 떨어졌다. 초조하게 움직이던 손가락은 힘이 풀린 듯 멈춰 있었다.
"난 두려워, 프롱스. 내가 좋아했다는 걸 시리우스가 아는 것도, 그 후의 반응도. 내가 자기랑 친구 이상이 되길 바랄 만큼 큰 욕심을 부렸다는 걸 알면 얼마나 어처구니없어 할까?"
"맙소사, 그게 무슨 소리야? 자길 좋아해주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딨어?"
"보통은 그렇겠지만... 난 상황이 다르니까... 같은 방에서 몇 년을 사는 중이고, 옆에서 시리우스가 여자애들 만나는 모습도 다 봤고, 무엇보다 난... 게이인 친구가 스트레이트인 자신을 좋아하는 것만도 부담일텐데 나는... 이미 기본적으로 너희랑 다르니까... 날 경멸할지도 모르고 동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어. 로버트랑 사귀면서 이미 마음을 정리했다고 나 자신은 믿고 있지만... 시리우스가 여자애들이랑 만나는 모습을 보는 건 여전히 괴로워. 요즘 내 맘이 편한 건 시리우스가 아무도 만나지 않아서 인지도 모르지. 정말 웃기는 소리지? 이건 로버트에게도 못할 짓인데...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일을 벌인 것 같아서 두려워."
나지막한 목소리에 담긴 괴로움과 죄책감에 제임스의 마음도 아려왔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 그저 리무스의 어깨를 잡아당겨 끌어안아줄 뿐이었다. 리무스의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울고 싶으면 그냥 시원하게 울어도 돼, 무니. 그냥... 담아두지만 말고 한번은 쏟아내버려."
벽난로 주변을 제외하고 휴게실은 전체적으로 어둑어둑했다. 장작 타는 소리와 친구의 서글픈 숨소리를 들으며 제임스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남학생 침실 쪽에서 다다다닥 빠르게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헐렁한 외투 주머니에 투명망토를 말아 쑤셔넣은 시리우스가 나타났다. 리무스가 급히 제임스에게서 몸을 떼고 얼굴을 문질렀다.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한 시리우스가 묻는 듯한 시선을 제임스에게 던졌지만 제임스는 묻지 말라고 고개를 저었다.
"저기, 나 갔다올게. 무니 졸린 것 같은데 얼른 자고 프롱스 넌 좀 씻어라. 안 그래도 꼬질한 얼굴이 더 꼬질하다."
"이목구비는 네가 조금 나을지 몰라도 피부는 이 제임스님이 훨씬 매끌매끌한데 뭔 헛소리야? 릴리한테 걸리기 전에 얼른 나가."
휴게실을 휙 둘러본 시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리무스에게 잠시 시선을 던지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약간 잠긴 목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조심히 다녀와, 패드풋."
살짝 미소 띤 시리우스의 얼굴이 리무스를 돌아보았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는 친구의 뒷모습과 그 모습을 바라보는 다른 친구의 얼굴을 보며 제임스 포터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어휴. 골치 아픈 녀석들. 도대체 니들은 왜 이렇게 복잡하게 사냐? 옆에서 보는 사람이 더 두통나는 관계가 여기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