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무] 관찰자 39
관찰자 39
- 해리포터 시리무 팬픽입니다. bl 싫어하시는 분께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무방비 상태였던 리무스는 시리우스의 무게에 밀려 균형을 잃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놀란 제임스의 눈과 더 놀란 리무스의 눈이 마주쳤다. 둘을 더 당황하게 한 것은 시리우스의 만족스러운 한숨 소리였다.
"아......좋다....."
자기 목덜미에 코를 묻고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는 시리우스의 행동에 리무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차갑고 단단한 코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숨결이 피부를 간지럽히는 느낌에 어찌할 바를 몰라 굳어 있던 리무스는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시리우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인을 잃어버렸던 개가 주인과 재회한 듯한 광경에 제임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 이게 뭐야? 패드풋이 냄새로 널 알아보는 모양인데?"
리무스가 민망함에 눈을 흘겼지만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웃음이 좀체 멈추지 않아 제임스는 침대에 걸터앉아 한동안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리우스는 진공 상태에서 산소통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리무스의 목덜미에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리무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혹시 내... 냄새 맡으니까 기억나는 거 있어? 내 얼굴을 본 적은 없을 텐데..."
리무스의 목에서 얼굴을 떼지 않은 채 시리우스가 웅얼웅얼 대답했다.
"익숙한 냄새야. 내가 아주 좋아하는 냄새인 것 같아. 넌 누군지 모르겠지만 냄새는 똑같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 냄새야."
말을 할 때마다 목에 닿았다 떨어졌다 하는 시리우스의 입술 탓인지, 말의 내용 탓인지 리무스의 얼굴이 토마토보다 더 빨갛게 변했다. 제임스는 이 광경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조차 잠시 잊을 지경이었다. 다시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제임스도 바닥으로 내려가서 두 사람 옆에 앉았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 이름 기억나? 그 냄새의 주인공 말이야."
시리우스가 천천히 리무스의 목덜미에서 고개를 들었다. 입을 삐죽 내민 표정이 속상한 어린아이 같았다.
"얼굴이 떠오를 것 같기도 해. 나를 쳐다보고 웃는 것 같기도 하고. 근데 거기서 더 알려고 하면 안 된다고 했어."
"누가?"
"어머니가. 약혼식이 끝나기 전에는 절대 딴생각하지 말라고 하셨거든."
화가 치민 제임스가 펄쩍 뛰어오르며 시리우스를 향해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네 생각을 왜 네 어머니가 통제해? 그놈의 저주를 풀자구! Finite Incantatem!"
제임스와 리무스는 잠시 숨을 죽이고 시리우스를 살폈다. 하지만 둔탁해진 은회색 눈동자에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울화가 치민 제임스가 침대 다리를 걷어찼다. 리무스는 시리우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침대에 앉혔다.
"젠장할 마귀할멈 같으니, 시리우스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블랙 부인은 엄청난 힘을 지닌 마녀니까... 알파드 씨도 쉽게 풀리지 않을 거라고 했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뭔가 강한 충격을 받으면 풀릴 것 같은데.. 어떻게 충격을 줘야 이 저주를 풀지?"
둘의 초조한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리우스는 다시 리무스 냄새 맡기에 몰두했다. 리무스는 얼굴이 달아오른 채 긴장한 표정으로 목덜미를 내맡기고 있었고, 제임스는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으며 주변을 서성거리다 한껏 숨을 들이마시며 묘하게 끙끙대는 시리우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 내 냄새는 맡고 싶지 않아?"
"전혀."
일 초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대답에 잠시 멍했던 제임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넌 나도 좋아하는, 아니 좋아했는데, 아니 좋아하는데... 아오, 제정신이 아니니 과거형으로 말해야 할지 현재형으로 말해야 할지조차 헷갈리네. 하여간 왜 무니 냄새만 좋아해? 우리 둘 다 네 친구인데."
시리우스가 뻔한 걸 왜 묻냐는 듯 눈썹을 우아하게 추켜올리며 대꾸했다.
"난 초콜릿과 양피지 냄새를 좋아해. 그리고 네 발에선 뭐랄까, 양말을 사흘쯤 안 갈아 신은 듯한 냄새가 나."
리무스의 얼굴이 웃음을 참느라 더 빨갛게 변했다. 제임스는 시리우스의 태연한 얼굴을 향해 눈을 흘기며 정신이 돌아오면 머리통을 벽에 짓찧어 주겠다고 중얼거렸다.
"사실 네 냄새도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긴 해. 느낌은 좀 다르지만. 어쨌거나 뭐든 떠올리려면 약혼식부터 끝내야 해. 근데 너희는 여기 왜 온 거야? 내 어머니 허락은 받고 온 거야?"
둘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발부르가에게 순종하고 있는 상태의 시리우스에게 진실을 말해도 괜찮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눈빛으로 제임스와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은 끝에 리무스가 말했다.
"우린 네 기억을 되찾아주려고 왔어. 네 어머니 의견은 미처 듣지 못했지만. 왜냐하면... 음, 만나기 쉬운 분은 아니니까. 네가 나랑 제임스 냄새가 친숙하게 느껴진다고 하니까 하는 말인데... 네가 아직은 기억 못 하지만 우린 정말 널 위해서 온 네 친구들이야. 믿어주면 좋겠어."
냄새 맡기를 잠시 멈추고 고개를 든 시리우스가 리무스와 눈을 맞추며 쑥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네 냄새는 친숙한 거 이상이야. 가슴이 막 쿵쾅거려."
"아...고, 고마워."
닭살 돋는 장면에 제임스가 눈을 빙글 굴렸다.
"제정신일 때보다 훨씬 작업을 잘하는군. 어쨌든 우릴 믿어? 네 확답이 필요해."
시리우스가 다시 리무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웅얼거렸다.
"머리로는 아무 생각이 없는데 본능적으로 믿게 되네. 냄새 때문인가... 하여간 믿어. 좋은 애들이란 느낌이 들어. 이런 향기를 가진 사람이면 나쁠 수가 없지. 그리고 희한하게 네 발 냄새는 고약한 데도 뭔가 믿음이 가."
"그거 고맙네. 멀린의 팬티에 맹세코 네 정신이 돌아오면 그 민감한 콧구멍에 내 양말을 쑤셔 넣어주지. 두고 보자구."
냄새 논쟁이 더 이어지기 전에 리무스가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를 믿는다고 하니까 얘기할게. 일단 우리는 네 어머니 허락을 받고 온 건 아니지만 우리에게 오지 말라고 하신 적도 없으니까 엄밀히 말하면 너도 우리도 네 어머니 명령을 어기지 않았어. 그러니 우리가 여기 왔다는 사실을 네 어머니나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지 않았으면 해. 그렇게 할 수 있겠어?"
고개를 끄덕이는 시리우스를 보며 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꼭 기억해야 해. 여기 냄새가 좋은 무니랑 발 냄새가 독한 나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여긴 없지만 우리 못지않게 친숙한 냄새가 나는 또 다른 사람이 있는데 걔도 네 친구야. 네 동생 레귤러스랑 네 약혼녀 로랑도 믿을 수 있으니 어떤 일이 벌어지든 우리가 부탁하는 대로 따라 줘야 해."
제임스의 말에 시리우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니 뜻이랑 다르면 너희 말을 따를 수 없는데...내가 원해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거야.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 상황이 그래. 어머니 말씀이 최우선이라고 누군가 뇌에 글자를 새기는 느낌이랄까. 뭔가 더 생각하려고 하면 머릿속이 뿌옇게 변해."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며 리무스가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네가 힘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 기억을 찾게 되면 그런 증상도 사라질 거야. 우리를 믿어 줘."
고개를 끄덕이며 리무스를 바라보던 시리우스가 손을 들어 리무스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왠지 너한텐 밝은 갈색머리가 어울릴 것 같아. 금빛이 섞인... 그리고 눈동자는..."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고 레귤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숨어! 누군가 오고 있어."
제임스는 침대 한쪽에 걸쳐 둔 투명망토를 재빨리 집어 들고 지팡이의 불을 껐다. 리무스가 시리우스의 손을 꼭 쥐고 다급히 속삭였다.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건 비밀이야. 우릴 믿고 비밀을 지켜 줘."
제임스와 리무스가 투명망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에 시리우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감탄하는 말을 내뱉으려는 찰나에 다시 문이 열렸다. 희미한 불빛 속에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벨라트릭스였다. 뒤이어 루시우스 말포이가 들어와 문을 닫았다.
"이 인간들이 얌전히 앉아 있으리라고 생각한 내가 어리석었지. 레귤러스랑 교대를 했기에 망정이지 다른 멍청이를 앉혀 놨으면 눈알을 뽑아 버렸을 거야."
루시우스가 나직하게 낄낄거렸다.
"둘 다 너한테 단단히 찍혔구나. 로돌푸스가 라바스탄한테 휘둘리지 않게 당분간 둘을 떼어 놓지 그래?"
"라바스탄이 아니라도 아무한테나 휘둘릴 인간이야. 자기 생각이란 게 없거든."
"그래서 로돌푸스랑 결혼한 거 아니었나?"
"시끄러워. Lumos."
벨라트릭스의 지팡이 불빛이 시리우스가 앉아 있는 침대 쪽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없는 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한 벨라트릭스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이 망나니가 지금처럼 마음에 든 적이 없다니까. 고분고분 인형처럼 있는 게 딱 좋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루시우스가 중얼거렸다.
"대단한 능력이야. 이렇게 지독한 녀석을 꼼짝 못 하게 잡아둘 수 있다니. 이런 강도와 지속력을 지닌 임페리우스 저주는 본 적이 없어."
"감탄만 하지 말고 배워. 우리의 우월한 핏줄에 흐르는 마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그분의 말씀을 잊지 마. 능력을 썩히는 건 죄악이야."
"충고 고맙지만 너만 그분의 충복이 아니란 걸 잊지 마, 벨라트릭스. 알다시피 내가 듣고 싶은 얘기는 따로 있지. 이 녀석을 데리고 내려가기 전에 말해 봐. 네가 두 달 전에 슬러그혼을 만난다는 핑계로 호그와트에 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교장실에 몰래 들어갔다는 것도. 원하는 걸 손에 넣었으니 약혼을 진행했겠지. 도대체 덤블도어의 방에서 뭘 훔쳐서 약혼 예물로 내놓는 거야?"
예상치 못한 정보에 제임스와 리무스는 숨소리를 더욱 죽이고 귀를 쫑긋 세웠다. 벨라트릭스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후후후훗, 그걸 물어보려고 아침부터 날 쫓아다닌 거야? 발부르가 이모 외엔 아무에게도 말 안 했는데 그렇게 궁금해하니 살짝 귀띔해 주지. 내놓기 아까울 정도로 대단한 물건이야. 어지간해선 상상도 못 할 물건이지."
"그래, 대단한 물건이니 이 대단한 약혼에 예물로 내놓았겠지. 그만 뜸 들이고 말해 봐."
궁금해서 몸이 달은 루시우스에게 흡족한 미소를 날린 벨라트릭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노트야. 그 유명한 겔러트 그린델왈드의 노트. 잡종과 머글 수백 명쯤은 가볍게 없앨 수 있는 주문이 담긴."
투명망토에 가린 제임스와 리무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시리우스는 아무도 없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계속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어 어떤 표정인지 알 길이 없었다. 루시우스는 너무 놀라 입을 쩍 벌렸다.
"그린델왈드의 노트? 바로 그 그린델왈드? 그린델왈드의 노트를 준다고?"
얼굴 가득 사악한 미소를 띤 벨라트릭스가 대꾸했다.
"그래. 바로 그 그린델왈드의 노트야. 내주긴 아깝지만 로랑 측이 내놓을 예물도 꽤 괜찮은 편이라 교환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지."
"그 사람들은 뭘 주기로 했는데?"
벨라트릭스의 눈이 번쩍 빛났다.
"잡종이 태어나는 걸 막는 물약 제조법. 마법사와 머글이 아무리 육체관계를 맺어도 애가 생기지 않게 만드는 거야. 굉장하지? 우린 이미 생긴 잡종과 머글을 제거하는 방법을, 그쪽은 아예 잡종이 발생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주고받는 거니까 서로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지. 안 그래?"
- 40장에서 계속
- 너무 오랜만에 업뎃하게 되었습니다. 현생을 탓해 보지만 결국 제 무능 탓이지요ㅠㅠ 똥글이지만 기다려 주시는 분들 정말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