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무] 씁쓸하고 달콤한
- 해포 시리무 팬픽입니다. bl 불편하신 분께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 '관찰자'가 매끄럽게 안 나오고 시간은 자꾸 가서ㅠ 단편 하나 쓰면 나아질까 싶어 써봤는데 이것도 잘 안 써지네요ㅠㅠ 똥글 읽어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 볼드모트 없는 세계관입니다. 졸업 후 시리우스는 오러국에서, 리무스는 허브농장에서 일하는 설정입니다. 제임스는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았고, 릴리는 힐러로 성뭉고에서 일하고, 피터는 과자회사 직원으로 일하며 평온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1.
런던 끄트머리에 자리한 낡고 좁은 주택의 계단을 올라가며 시리우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가파르게 만들려고 작정한 듯한 계단과 닳아서 맨질 거리는 난간 손잡이가 서로 질 세라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리무스가 보름을 넘기고 너덜너덜한 몸과 마음으로 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이 시큰해졌다. 졸업하고 같이 살자고 설득하고 조르고 협박한 게 몇 년이던가. 알파드 삼촌이 물려준 집이니 나도 공짜로 얻은 거다, 정 집세를 내고 싶으면 네 상황 따라 받겠다, 나 혼자 지내니 집이 쓰레기통을 넘어 폐허가 되어 간다 등 온갖 이야기를 꺼내보고 제발 시리우스가 인간답게 살도록 네가 희생해 달라는 제임스, 릴리, 피터의 읍소까지 동원해 봤지만 리무스는 꿈쩍하지 않았다. 최후의 발악으로 넌 사실 날 싫어하는구나, 블랙이랑 얽히는 게 부끄럽냐는 소리까지 뱉었지만 리무스는 눈만 도르륵 굴렸을 뿐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같이 살아달라는 애원은 씨도 먹히지 않은 채 끝났고 리무스가 허브농장에 취직하면서 지은 지 백 년은 넘은 듯한 이 건물 꼭대기방을 빌려 산 지 어느덧 오 년이 흘렀다. 시리우스가 오러로 일한 지도 오 년, 블랙이라는 성에 이맛살을 찌푸렸던 무디는 이제 범죄자들과 한 판 붙을 때면 자동으로 시리우스와 등을 맞대는 사이가 되었다.
최연소 오러 국장이 될 것이란 이야기도 솔솔 흘러나올 만큼 시리우스는 탁월하고 뛰어난 오러가 되었다. 그 성질머리와 입만 통제할 수 있다면ㅡ 이라는 가정이 늘 붙긴 했지만.
이 모든 능력에 황홀한 외모까지 갖춘 덕에 시리우스는 마법사일보나 주간마녀에 종종 사진이 실리곤 했다. 제임스네 뒷마당에서 피터와 셋이 스니치를 쫓으며 노는 사진이 월간 퀴디치에 실리기까지 했다.
주위에서 자신을 두고 어떤 눈빛이나 이야기가 오가건 늘 그랬듯 시리우스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그의 눈길을 끌려 애쓰는 사람들이 넘쳤지만 시리우스는 무덤덤했다. 그가 원하는 건 학생 때처럼 제임스, 피터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몇 달에 한 번 얼굴 보기도 어려운 리무스 루핀을 만나는 것이었다. 도대체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가 화가 치민 시리우스는 리무스의 방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리무스! 리무스! 루ㅡ핀! 집에 있는 거 아니까 열어! 루ㅡ핀!"
낡고 좁은 건물 안에 시리우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잠시 주먹을 문에 대고 기다리자 안쪽에서 자물쇠 여는 소리가 들렸다. 문틈이 벌어지자마자 시리우스는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 문을 닫았다. 거친 행동에도 놀라는 기색 없이 차분한 갈색 눈동자에 시리우스는 더 화가 치밀었다. 외투를 건네받으려 내민 리무스의 손을 무시하고 시리우스는 성큼성큼 방 한가운데 있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피곤해 보이네. 차 끓여줄게."
마치 몇 시간 전에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몇 달 만에 마주하는 게 아닌 것처럼 리무스는 담담히 주방으로 향했다. 따라가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익숙한 동작들이 나지막한 소리로 들려왔다. 주전자에 물을 받아 스토브에 올리고 거름망에 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붓고 우러난 차를 머그에 담아서... 발소리도 거의 없이 나온 리무스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머그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따뜻할 때 마셔."
자기 몫의 머그를 쥔 리무스는 소파 옆에 비스듬히 놓인 작은 나무의자에 걸터앉았다.
잔잔하다 못해 무심해 보이는 태도에 시리우스는 다시 욱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머그를 가까이 대고 따뜻한 향을 들이쉬는 리무스의 얼굴에 어느새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은은한 불빛과 피어오르는 뽀얀 김 사이로 내리깐 속눈썹, 창백한 피부 여기저기 흩어진 옅은 주근깨, 차의 온기 때문인지 평소와 달리 촉촉해 보이는 입술... 물감이 안 마른 그림에 손가락을 대고 싶은 느낌에 시리우스의 손가락 끝이 저릿했다.
"지난주 해리 생일파티는 재미있었어? 못 가게 되어 미안하다고 릴리랑 제임스한테 편지했더니 괜찮다고 답장 오긴 했는데 그 뒤론 아직 연락을 못했네."
"그 파티만이 아니잖아."
"...지난 달 피터 여자친구 만나는 자리에 못 간 것도 있네. 피터에게도 미안하다고 미리 편지는 했어.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무슨 뜻인지 알면서 말 돌리지 마!"
시리우스는 탁자에 놓인 머그를 눈으로 깰 듯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지난주, 지난달, 파티 하나, 모임 하나...그런 걸 따지는 게 아니잖아. 네 존재 자체가 우리 사이에서 사라지고 있어. 만나자고 하면 늘 사정이 있다고 거절하지. 생일이면 네가 아니라 부엉이가 카드와 선물을 들고 나타나. 릴리가 해리 낳을 때도 넌 성뭉고 근처에도 안 왔지. 덤블도어가 지난 연말에 연 모임에도- 그 양반이 아끼는 제자들만 불러 모은 모임이 자그마치 십 년만이라던데 그 모임도 거절했지. 그러니 내 승진 파티 따윈 안중에도 없었겠지. 호그와트에서 친하지도 않았던 애들까지 나타났는데..
얘가 도대체 왜 이러지,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제발 얼굴 좀 보자고 해도 다음에, 나중에.. 어쩌다 만나도 누가 볼세라 얼굴만 비치고 금세 사라지고... 이유도 두루뭉술하니 일이 있다, 사정이 있다만 반복이지. 다들 일하고 다들 사정 생기지만 적어도 몇 주에 한 번 얼굴 볼 시간은 내고 살아. 너만 빼고. 친구도 못 만날만큼 허브 따느라 바쁜 거야? 아님 이제 우리가 필요 없는 거야? 울프스베인이 있어서 보름에도 죽도록 아프진 않으니까?"
마지막 말은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라고 시리우스는 말을 뱉는 순간 무너지는 리무스의 표정을 보고 후회했다. 차분하던 갈색 눈동자가 파도에 뒤집히기 직전의 배처럼 크게 일렁였다. 상처에 칼을 꽂았다는 걸 깨달은 시리우스는 다친 짐승처럼 통증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눈동자를 볼 수 없어 다시 머그로 눈길을 돌렸다. 거의 식었는지 더 이상 김이 오르지 않는 머그를 들고 미지근한 차를 꿀꺽꿀꺽 넘겼다. 씁쓸한 맛이 입안을 채웠다. 매정하게 굴어놓고 뒷감당도 못하는 주제에 왜 온 걸까. 눈 하나 둘 곳을 몰라 쩔쩔매는 자신이 우스워 시리우스는 벌떡 일어났다.
"갈게."
문지방을 넘어서는 시리우스의 등 뒤에서 리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이거 가지고 가."
놀라서 돌아선 시리우스의 손에 작은 회색 주머니가 들어왔다. 뭐냐고 묻는 표정에 리무스의 손이 시리우스의 왼쪽 관자놀이 아래에 닿았다 떨어졌다. 자기 행동에 놀라기라도 한 듯 뒤로 한 발 물러선 리무스가 입을 열었다.
"몇 달 전부터 두통 나면서 거기가 자꾸 쑤신다고 들어서... 아까 너 마신 건데 파페로 잎이라는 거야. 따뜻한 물에 천천히 우려서 마시면 좋아. 눈에 잘 띄지 않는 풀이라 채집하는 데 시간이 걸렸어. 효과 좋으니까 꼭 마셔."
주머니 안에서 마른 잎이 버석거리는 것을 느끼며 시리우스는 잠시 멍하니 리무스를 바라보았다. 달랑 전구 하나가 밝히고 있는 복도는 어두웠지만 리무스의 갈색 눈동자가 물기로 흠뻑 젖어있는 것을 시리우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무슨 말을 할까 망설이는 사이 문이 조용히 닫혔다.
2.
"작년 겨울에 리무스 아버지가 돌아가셨대."
갑작스러운 말에 시리우스는 방금 제임스가 건넨 와인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루핀 씨가? 무슨... 넌 어떻게 안 거야?"
"지인의 지인을 통해서. 루핀 씨가 리무스 그 사고 이후로는 사람 만나는 걸 극도로 꺼렸다고 하더라. 장례식에 직장 사람들이랑 친척 몇 사람만 왔었대. 간소하고 조용히 치러달라는 유언도 있었고."
"그래서... 리무스가 우리에게도 안 알린 거야?"
"그랬겠지. 나도 며칠 전에 들은 거라 아직 리무스에게 연락 안 했어. 릴리랑 상의해 봤는데 본인이 먼저 얘기하기 전에는 그냥 모르는 척하라고 해서 일단 그럴까 싶네."
화가 치민 시리우스는 벌떡 일어나 방안을 서성였다.
"걔가 퍽이나 먼저 얘기하겠다!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지금도 입 다물고 있는 거 보면 몰라? 무니는 그냥... 이제 우릴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 거라구!"
"목소리 낮춰. 해리 자러 갔는데 너랑 나랑 싸움난 줄 알고 내려오겠다. 친구로 생각하고 안 하고 그런 건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니니까 섣불리 그런 말 꺼내지 마."
"모르는 사람보다 더 못하게 구는데 무슨 판단이 필요해? 리무스는 우리가 필요없는 거야. 내가 걔한테 지난번에 했던 말이 맞았어. 그냥 솔직한 대답을 듣고 오는 건데 괜히 일어났지."
뭔가 불길한 느낌에 제임스의 눈썹이 꿈틀 했다.
"리무스 만났어? 뭐라고 했는데?"
와인을 쭉 마시고 잔을 내려놓은 시리우스가 한숨을 쉬고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울프스베인 있어서 안 아프니까 이제 우리가 필요 없는 거냐고 했어."
"뭐?!"
제임스가 벌떡 일어나 시리우스의 어깨를 확 밀쳤다.
"너 그게 할 소리야? 울프스베인이 통증 줄여주는 거랑 아무 상관도 없는 거 몰라서 그딴 소릴 뱉었어? 리무스가 자해하거나 남 해치지 않게 정신줄만 잡아주는 거라구! 맨 정신으로 변신하는 거니까 고통은 다를 게 없는데 다 알면서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거야?"
시리우스도 지지 않고 씩씩대며 거칠게 제임스 어깨를 밀쳤다.
"울프스베인 사용하고 나선 보름에 아예 무니를 찾을 수 없었으니까! 졸업하고 보름에 더 이상 오지 말라고 우리 피해 다닌 거 기억 안 나? 너랑 피터는 두세 번 찾아다니다 포기했지만 난 계속 찾아다녔어. 몇 번은 늑대로 변했을 때 나타나서 같이 있다 변신 풀리기 전에 떠나는 식으로 같이 보냈지. 하지만 울프스베인을 사용한 후로는 정신이 맑은 상태로 있으니 어딘지 내가 아예 못 찾을 곳에 가서 보름을 보내고 오더라. 날 다치게 할 위험도 없는데 피한 거라구! 그게 무슨 뜻이겠어? 이젠 나랑 같이 있기 싫다는 거잖아!"
방을 서성이며 소리를 지르던 시리우스는 머리가 지끈거리자 벽에 기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는 그의 어깨에 작은 손이 닿았다. 시리우스는 계속 눈을 감은 채 물었다.
"목소리가 너무 컸네. 해리는 안 깼어?"
"해리가 깼으면 넌 벌써 쫓겨났지. 가뜩이나 너랑 논다고 자기 싫어하는 걸 끌고 올라갔는데."
릴리는 시리우스의 팔을 끌어다 의자에 앉혔다.
"자기, 우리 차 한 잔씩 갖다 줄래? 일전에 선물 받은 거 있잖아. 찬장 맨 앞에 있어."
시리우스와 얘기 좀 하게 잠시 나가 있으란 소리였다. 말 잘 듣는 남편 제임스는 릴리의 뺨에 입을 맞추고 방을 나갔다. 릴리가 긴 한숨을 쉰 후 시리우스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제임스도 철이 들었는데 넌 도대체 언제 철들려고 이러는 거야? 리무스한테 정말 그렇게 말했어?"
"이미 들어놓고 뭘 물어. 그렇게 말했고.. 리무스가 울었어. 소리 없이 눈물만 그렁그렁했지. 젠장할.. 자려고 눈만 감으면 자꾸 생각나서 죽겠으니까 잔소리라면 그만둬."
눈을 피하며 입술을 짓씹는 모습에 릴리의 한숨이 더 길어졌다. 멍청한 놈, 등신, 개새끼라는 단어가 섞여서 들렸다. 학교 다닐 때부터 릴리는 한숨 쉬면서 욕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너 우리 결혼사진에서 리무스 어디 있는지 알아?"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릴리가 주문으로 벽난로 위에 놓인 액자 하나를 가져다 시리우스에게 내밀었다. 제임스와 릴리가 활짝 웃으며 가운데 서 있고 제각기 멋진 로브를 차려입은 호그와트 지인들이 세 줄로 서 있는 사진이었다. 시리우스 자신과 피터는 제임스 옆에서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활짝 웃고 있었다. 리무스 역시 맨 앞줄에 있긴 했지만 한쪽 끝에서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옆에 있는 나무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 것 같은 모습으로. 시리우스는 리무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것처럼 손가락 끝으로 사진을 매만졌다. 넌 왜 여기서 이렇게 서 있니. 숨고 싶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찍은 사진이라 아무 생각 없었는데 나중에 앨범을 보다 리무스가 찍힌 사진이 다 이렇다는 걸 깨달았어. 찍힌 사진 자체도 거의 없지만. 우리 결혼식이면 울프스베인 나오기 한참 전인 거 알지? 더 놀라운 건 뭔지 알아? 학교 다닐 때 가끔 찍은 사진에서도 리무스는 항상 구석에 있었다는 거야."
릴리의 말에 시리우스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학교 때도 그랬다고? 사진을 찍을 때면 으레 웃고 장난치느라 바빴기에 리무스가 구석에 숨듯이 찍을 거라곤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다.
"리무스가 우릴 피하는 거 제임스도, 나도 알고 있어. 해리를 봐도 선뜻 말을 걸거나 안아주려 다가오지 않아. 해리의 기억에도 남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근데 쳐다보는 눈빛만 봐도 얼마나 예뻐하는지 다 느껴져. 둔탱이 제임스도 느끼고 나한테 먼저 얘기했을 정도라니까."
릴리의 목소리에 잠깐 웃음이 묻어났다 사라졌다.
"리무스는 계산적인 애가 아니야. 너도 알잖아. 울프스베인 덕에 더는 널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네가 계속 오해한다 해도 본심을 밝히느니 차라리 그게 낫겠다고 체념할 애지. 억지로 붙잡으려 하면 서서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확 도망갈지도 몰라. 리무스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 시간을 갖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시리우스는 눈두덩이를 두 손으로 꾹 눌렀다. 통증이 관자놀이에서 눈으로 옮겨 가는 것 같았다.
"말 안 하고 희미해지다 어느 날 아예 사라지면? 그래도 계속 기다려야 해? 당장이라도 사라질까 봐 무서운데 언제까지 기다려?"
릴리가 나직하게 흠 소리를 냈다. 문이 열리고 제임스가 찻잔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계속 이러고 있었어? 만성두통이면 진찰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시리우스가 원하면 내일이라도 병원 예약 잡을 수 있어. 메리 지도하는 힐러가 두통 전문이야. 일단 차부터 마셔."
병원은 사양이라는 뜻으로 손을 휘휘 저은 시리우스는 찻잔을 들어 얼굴 가까이 댔다. 연한 녹색 찻물에서 뽀얀 김과 달달한 향기가 올라왔다. 심란하던 마음이 손가락을 타고 번지는 온기와 함께 서서히 가라앉았다.
3.
오랜만에 온 호그와트는 날씨 탓인지 스산해 보였다. 냉기가 머릿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아 이맛살을 찌푸리며 시리우스는 교장실로 들어섰다.
"교장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 늙은이를 보러 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나 보군, 블랙 군."
블랙이라는 말에 질색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덤블도어는 껄껄 웃으며 의자를 권했다. 시리우스가 오는 기척을 느끼고 미리 준비했는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양하지 않고 바로 차 한 모금을 넘기자 새콤한 맛과 함께 온기가 밀려들었다.
"지난주에 앨러스터를 잠깐 만났는데 자네 칭찬을 하더군. 대놓고 칭찬하는 일이 별로 없는데 자네랑 일하는 게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야."
덤블도어의 흐뭇한 미소에 시리우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지난 오 년 동안 퍼부을 욕은 다 퍼부었으니 욕 떨어져서 칭찬으로 넘어간 거죠."
"앨러스터도 똑같이 말하더군. 자네가 오 년 간 온갖 말썽은 다 일으키더니 이제 지쳐서 말 듣는 거라고."
"학창 시절에도 모범생이었던 제가 말썽이라니 그 양반, 교장선생님이 못 믿을 소리만 했군요."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덤블도어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내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모범생은 늘 리무스였지, 자네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리무스의 이름에 시리우스는 찻잔을 내려놓고 교장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부르신 건지 모르겠지만, 혹시 리무스랑 관련된 일이라면 제가 딱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요즘 만나지도 않으니까요."
까칠한 대꾸에도 덤블도어의 미소는 흔들리지 않았다.
"리무스가 사람 만나길 꺼린다는 얘기는 들었네. 나 역시 파티 초대를 정중하게 거절당한 바 있고."
시리우스가 대답하지 않자 덤블도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리무스가 일하는 곳에 가본 적 있나?"
"아뇨. 리무스가 막 농장에서 일하게 됐을 때 가보려고 했지만 매번 만류해서.. 딱 잘라 거절하는 게 나을 만큼 오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해서 가지 않았습니다. 이젠 새삼 갈 이유도 없어졌구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교장은 마치 그림 구경이라도 하듯 역대 교장들의 초상화 앞을 느릿느릿 걸었다.
"넓고 쓸쓸한 곳일세. 온통 푸른색으로 덮여 있지만 종일 사람 하나 구경하기 힘든 곳이지. 일이 힘들기도 하지만 외로워서 그만두는 사람이 많아. 마법세계에 필요한 귀한 허브들이 많이 자라지만 돌볼 일손은 늘 부족하지."
"사람 만나기 싫어하는 성격에 딱 맞는 직장을 찾았네요."
냉담한 말투에 덤블도어가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지만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리무스를 호그와트에 입학시키려 찾아갔을 때가 떠오르는군. 열 살 아이가 내게 얼마나 심각한 표정으로 묻던지 지금도 생생하네. 친구를 사귀지 않아도 학교에 다닐 수 있냐고 물었었지. 아마 친구를 사귀지 못해도 다닐 수 있냐고 묻고 싶었던 것 같아. 머글학교에 다니고 있긴 했지만 주기적으로 아프고 눈에 띄는 곳에 상처가 있으니 아이들의 표적이 되곤 했다더군. 그레이백의 공격에서 살아남았으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리무스 본인에겐 정반대로 느껴지는 날이 훨씬 많았을 거라네. 호그와트에 와서 친구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소중한 친구들이라면 왜 피하는 거죠?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전 그게 답답한 겁니다."
"소중하니까 피한다고 생각하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군."
나이 든 스승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시리우스를 응시했다.
"지난번 내 초대를 거절했을 때 리무스가 보낸 사과 편지에 이런 글귀가 있었네. '제가 가지 않는 것이 교장선생님에 대한 제 진심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란 생각이 듭니다.'라고. 내 입으로 이렇게 말하긴 쑥스럽지만 내 착각이 아니라면 고맙게도 리무스는 항상 나를 좋아하고 존경해주었지. 날 위해서 오지 않은 걸세."
"리무스가 저희를 피하는 게 결국 저희를 위해서라고... 그 얘길 하시는 건가요?"
"본인이 아니니 꼭 그렇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늙은이가 느끼기엔 그렇네. 그건 그렇고 오늘 와달라고 부탁한 건 다른 부탁이 있어서라네."
책상으로 돌아간 덤블도어는 무디에게 은밀히 전해달라며 둘둘 말린 양피지를 건넸다. 양피지 전달은 그저 핑계일 뿐임을 알면서도 노스승에게 고마운 마음에 시리우스는 양피지를 조심스레 받아 로브 깊숙이 넣었다.
4.
시리우스!
너 언제 퇴근하는지 몰라서 편지 남겨. 혹시 내 부엉이 마주치면 졸라도 먹을 거 주지 말고 돌려보내 줘. 얘가 요즘 너무 살쪄서 음식 조절 중이거든.
이번 토요일에 리무스 일하는 농장에 가자고 한 거 말이야,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난 가지 않는 게 맞는 것 같아. 제임스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제임스도 안 가는 게 나을 것 같고. 있잖아, 제임스랑 너는 제일 친하니까 아예 이런 상황이 생기지 않을 것 같고, 만약에 내가 리무스 입장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거든. 네가 날 안 좋아하거나 소홀히 한다는 뜻으로 이런 말 하는 게 아니고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건데 내가 너희 피했으면 네가 이렇게까지 몇 년을 신경 썼을까 싶어. 반대로 네가 우릴 피했다면? 난 네가 리무스에게 하듯 신경 쓰지 않았을 거야.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래.
네가 왜 그렇게 리무스에게 집착 미련 리무스가 멀어지는 걸 힘들어하는지 잘 생각해보면 어떨까? 그냥 친구한테 하는 행동이라기엔 좀 그래. 좀 무서워 쓰다 보니 만나서 얘기 안 하길 잘한 거 같네.
뭔 소린지 내가 쓰고도 모르겠지만 암튼 리무스랑 둘이 진지하게 얘기해봐. 리무스가 네 걱정 많이 했어. 몇 달 전에 편지했을 때 너 두통 얘기했더니 답장이 엄청 길게 왔었거든. 머리 아픈 데 좋은 허브랑 뭐 그런 얘기였는데 너한테 말해준다고 생각해 놓고선 깜박했어. 만나서 말했으면 네가 날 때렸을 것 같아 편지로 얘기하길 진짜 잘한 거 같네. 여자 친구랑 잘해보려고 정신없던 때였으니까 좀 봐주라. 주말에 다녀와서 소식 전해줘.
너의 진실한 벗 피터
추신: 제임스한테 울프스베인 얘기 들었어. 주말엔 제발 그런 미친 실수하지 마.
추신: 리무스한테 저번에 보내 준 차 정말 고맙다고 얘기해줘. 여자 친구가 아주 좋아했어.
추신: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새로 나온 초콜릿 보낼게 리무스한테 전해줘. 내 부엉이 앞에선 뜯지 마!
5.
교외의 봄 풍경은 생기가 넘쳤다. 머글의 접근을 막기 위해 쳐놓은 방어막을 지나 숲 속 깊이 걸어 들어가자 마침내 목적지가 눈에 들어왔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난 오솔길 끝에 농장 입구가 보였다.
'앤더슨 허브농장'
나를 보면 당황할까, 연락도 없이 왔다고 화를 낼까. 반겨주진 않겠지. 오솔길을 걸어가면서 시리우스는 발길을 돌릴까 말까 계속 망설였다. 다들 가만히 있는데 왜 나만 유난스럽게 널 들들 볶냐고 따져 묻진 않을까. 그러면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그냥 돌아갈까 싶어 시리우스는 농장 입구에서 결국 발을 돌렸다.
'겁쟁이 자식, 네가 그러고도 그리핀도르냐!' 제임스와 피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무심코 귀를 막으려는데 뒤에서 그의 이름이 들렸다.
"시리우스?"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겠구나 하는 마음에 시리우스는 잠시 멈칫했지만 용기를 끌어올려 뒤로 돌았다. 놀란 기색이었지만 늘 그렇듯 차분한 갈색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 든 바구니를 고쳐 쥐는 모습에 시리우스는 목을 가다듬었다.
"갑자기 와서 미안. 바쁘면 그냥 갈게."
잠시 시리우스의 눈을 응시하던 리무스가 농장 안쪽으로 몸을 반쯤 돌리며 대답했다.
"구경시켜줄게. 생각보다 넓고 볼 것도 꽤 많아."
덤덤하게 앞장서서 걷는 리무스의 등을 따라가며 시리우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깥처럼 나무가 빽빽하진 않았지만 큰 나무가 여기저기 서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키 큰 풀이 수북이 자란 곳도 있었고, 작은 풀이나 꽃으로 덮인 곳도 있었다. 나무와 흙, 풀과 물이 섞여 만들어낸 짙은 향기가 몸을 가득 채웠다. 개울물 소리가 들리는 곳에 이르자 리무스가 커다란 나무 아래로 시리우스를 이끌었다. 멀찍이 나무 사이로 지붕만 보이는 건물을 가리키며 리무스가 말했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 저기 가서 친구 왔다고 얘기하고 간식거리 좀 챙겨 올게."
"나 때문에 곤란해지는 거 아니야?"
리무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앤더슨 씨 부부는 좋은 분들이야. 항상 쉬엄쉬엄 일하라고 챙겨주시지. 편하게 있어. 오늘은 나랑 두 분만 일하는 날이고 아직 바쁜 철도 아니니까."
리무스가 자리를 비우자 시리우스는 한숨을 내쉬고 나무에 등을 기댔다. 그늘이었지만 다리를 쭉 펴니 햇볕이 닿아 따뜻했다. 로브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해리가 선물로 그려준 그림이며 제임스와 릴리가 들려 보낸 가족사진, 피터가 보낸 초콜릿 등을 만지작거렸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심한 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해야겠지. 긴장이 조금씩 풀리면서 간밤에 이루지 못한 잠이 밀려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에 시리우스는 만족스러운 소리를 내며 쭉 기지개를 켰다. 오래간만에 푹 자서 개운했다. 하지만 눈을 뜨자 자기 침실 천장이 아니라 온통 푸른 나뭇잎이 가득했다. 당황해서 몸을 벌떡 일으키고 고개를 돌리자 다정한 갈색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많이 피곤한 것 같아서 안 깨웠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시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온 것도 잊을 정도로 푹 잤네. 내가 너무 오래 잔 거 아니야?"
리무스가 고개를 저으며 하얀 머그를 내밀었다.
"30분도 안 잤을 거야. 자, 이거 로마리라는 잎으로 끓인 차인데 마시면 기운이 날 거야."
머그 안에서 찰랑이는 은은한 갈색 찻물을 들여다보며 시리우스가 씩 웃었다.
"너 예전부터 커피보다 차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여기서 일하니까 허브 전문가가 다 됐네."
"앤더슨 씨 부부가 많이 가르쳐주셨어. 처음엔 내가 금방 그만 둘 거라 생각하셨는지 말도 잘 안 거셨는데 계속 일하는 모습 보고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
"너처럼 성실하고 똑똑한 직원이 왔으니 그분들이 복 받은 거지. 너처럼 주말에도 일만 하는 사람을 어디서 찾겠어."
"허브는 주말 가리면서 자라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늑대인간인 거 알면서 날 고용해 준 분들이니까 당연히 성실하게 해야지."
내 이럴 줄 알았지. 시리우스는 눈을 흘기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늑대인간이 무슨 죄도 아닌데 그렇게 숙이고 들어가지 마. 너처럼 너 자신을 모르는 사람도 없을 거야. 넌 잘난 마법사들이 드글거리는 마법학교 최우수 졸업생이라구. 최고의 마법사 덤블도어와 맥고나걸이 탁월한 말썽꾼들을 제압하기 위해 직접 뽑은 반장이었고."
씁쓸한 웃음이 담긴 갈색 눈동자가 잠시 시리우스의 얼굴을 향했다 풀밭으로 떨어졌다.
"네가 날 좋게 기억해 주는 걸로 충분해. 내가 비록 학교 때처럼 네가 만족할 만한 모습이 아닐지라도... 나한테 실망하는 일이 생겨도 좋은 기억으로 덮어줘."
시리우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뭐야, 당장 어디로 가버릴 것처럼 그러지 마! 넌 도대체 왜 날 이렇게... 너 정말 나 겁나서 정신 놓는 꼴 보고 싶어서 이래?"
"아무 데도 안 가. 갈 곳도 없는걸. 그냥... 내가 너희 자주 못 만나도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리무스...무니...나 좀 봐. 고개 돌리지 말고. 제발."
시리우스는 리무스가 몸을 돌리지 못하도록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다. 놀라 흔들리는 눈동자가 보였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마른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지난번에 못되게 말한 것처럼..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우리 피하는 게 아니라는 거 알아.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지껄여서 미안해. 하지만 계속 이렇게 지낼 순 없어. 나는... 내가 원하는 건... 네 얼굴을 보고, 네 목소리를 듣고, 네가 내 곁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 그냥 친구가 할 말이 아니란 거 알아. 내가 원하는 것도 그냥 친구는 아니야. 그렇지만 네가 친구 이상을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더 바라지 않을 거야. 그저 피하지 말고 도망가지 말고 있어 줘."
소나기처럼 내리는 고백 속에서 리무스의 눈동자에 수많은 감정이 스치는 것을 시리우스는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난 그럴 수 없어..시리우스..미안해.."
6.
"블랙!"
귀청이 떨어져라 질러대는 소리에 사무실 안의 모든 이가 고개를 숙였다. 또 한바탕 몰아치겠구나. 정작 이름이 불린 당사자는 미동도 없이 허공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반응에 더 열 받은 무디가 이를 갈며 다시 고함을 쳤다.
"상한 생선 같은 눈깔 똑바로 뜨고 당장 내 방으로 들어와! 당장!!"
퀭한 눈동자가 데구루루 무디 쪽을 향했다 다시 허공으로 돌아갔다.
"방에서 욕먹으나 여기서 욕먹으나 똑같으니 그냥 여기서 하시죠."
"저런 얼빠진 개스ㄲ...! 이 따위로 할 거면 당장 짐 싸서 꺼져! 오러국에 좀비는 필요 없어!"
무디가 분노로 게거품을 물기 직전에 이르자 시리우스 옆자리에서 눈치를 보던 프랭크 롱바텀이 황급히 시리우스를 붙잡아 일으켰다.
"시리우스 목구멍에 커피라도 들이부은 다음 데려오겠습니다. 국장님도 열 좀 식히고 계세요."
"데려오지 말고 집으로 보내! 오늘 밤이 끝나기 전에 정신 차리는 게 좋을 거야! 내일도 이런 식이면 파면이다! 블랙, 내 말 듣고 있나? 파면이라고!"
무디의 고성을 뒤로하고 시리우스를 끌고 나온 프랭크는 곧바로 제임스 포터에게 긴급 연락을 취했다. 마법부 입구에서 짐짝을 넘겨받은 제임스는 자동차 뒷좌석에 그 짐을 쑤셔 넣고 어딘가로 향했다.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던 시리우스가 제임스에게 멱살을 잡혀 끌려간 최종 목적지는 낡고 좁은 소파였다. 그제야 정신이 든 시리우스가 고개를 들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야! 여길 왜 왔어?!"
"닥쳐!!!"
날카로운 포효에 놀라 돌아보니 릴리가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릴리의 손에 들린 지팡이에서 밧줄이 나와 리무스를 의자에 묶고 있는 광경에 시리우스는 입을 쩍 벌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릴리가 리무스를 저렇게 거칠게 다루다니..더 이상 짜증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릴리가 양팔을 쫙 벌리고 두 사람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너희 둘 등신 짓에 질렸어. 정신 사나워서 일도 못하겠고 해리랑 놀아주지도 못할 지경이야. 리무스 네 문제가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피하는 건 답이 아니야. 그리고 시리우스, 넌 멀쩡할 때도 못 봐줄 판인데 지금은 정말이지.. 사람들이 너 리무스한테 차이고 정신줄 놓은 꼴 보면 세기의 매력남이니 뭐니 그딴 개소리 못할 거야. 하여간 너희 둘이 알아서 결론을 내. 더 이상은 이렇게 못 살겠어. 우린 해리 동생 계획도 있어서 낮이든 밤이든 힘쓸 일이 많다구! 오늘은 시리우스 끌고 오느라 힘 다 빼서 제임스 기력이..."
시리우스와 리무스의 입에서 동시에 거부감 섞인 한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임스도 민망한지 신음소리를 냈다.
"오, 내 사랑 백합. 거기까진 얘기할 필요 없는데..."
"시끄러워. 그럼 우린 갈 테니까 둘이 얘기 잘해봐. 이번 주말 저녁에 우리 집에서 식사할 거야. 마루더즈는 모두 다 온다. 리무스 루핀, 내 말 들었지? 이번엔 어떤 핑계도 안 통해. 네가 못 오면 우리가 너 찾아가서 식사할 거야."
말을 마치기 무섭게 릴리는 제임스의 뒷덜미를 잡아끌고 문을 쾅 닫았다. 들으라는 듯 크게 주문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둘은 내일 아침 제임스가 풀어주러 올 때까지 방에 갇히게 되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시리우스는 어색한 표정으로 리무스에게 다가가 손으로 밧줄을 풀기 시작했다.
"지팡이가 없어서... 프롱스가 아까 몰래 빼돌린 모양이야."
"내 지팡이는 릴리가 대놓고 뺏어갔어. 돌려달라고 했다가 한 대 맞을 뻔했어."
심각하게 말을 나누던 둘은 곧 웃음을 터뜨렸다. 시리우스는 배가 아플 정도로 웃느라 손이 떨려서 한동안 밧줄을 풀지 못했다.
"릴리는 정말이지..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 중에 제일 무서워. 무디가 아무리 성질이 더러운 걸로 유명해도 릴리 앞에선 아무것도 아닐걸."
"제임스가 홀딱 반할 만해. 무섭고 솔직하고 화통하고..."
"정말 행운의 사나이지. 그렇게 원하던 사람의 마음을 얻었으니.."
시리우스의 씁쓸한 말에 리무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시리우스가 다시 밧줄을 풀려고 리무스의 등 뒤로 손을 뻗자 리무스가 몸을 뒤로 빼고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시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내가 솔직하지 못해서 일이 이렇게 됐어. 미안해, 패드풋."
"아니야. 말하기 힘든 이유가 있겠지. 내 욕심이 지나쳐서 널 다그친 게 잘못이야."
"아니야. 내 잘못이야. 지금 아니면 솔직하게 말할 용기가 안 날 것 같으니까 참고 들어줘."
리무스가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사실 지난겨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아버지는 훌륭한 학자였고 평판도 좋은 분이었는데 내가 물린 이후로 모든 게 변했지. 원인 제공을 아버지가 했든 안 했든 대가가 너무 가혹했어. 인생이 완전히 뒤집혔으니까. 내가 살아남은 게 아버지에겐 축복보단 저주였던 것 같아. 4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엔 상황이 더 안 좋아졌어. 아버지는 쓸쓸하게 시들어갔지만 난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어. 내가 호그와트에 다니는 걸 눈치챌까 봐 친척이나 친구와의 인연도 끊어서 회사에서 지내는 시간을 빼면 늘 혼자 지내셨지."
갈색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시리우스는 조심스럽게 젖은 눈가를 손으로 훔쳐주었다.
"아버지가 연구하던 자료를 모아 책을 내려고 했던 적이 있어. 근데 마법세계가 좁아서 어딜 가도 아버지에게 늑대인간 아들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꼭 있더라. 책을 낸다고 접촉하고 연락하고 알아보고 하다 보면 결국 내 존재랑 내가 호그와트에 다니는 걸 들키게 되니까 아버지는 출판을 포기했어. 술을 잔뜩 마시곤 인생을 바쳐 연구했지만 쓸모없는 종잇장만 가득 쌓은 셈이라고 하셨지. 내가 소름 끼치게 무거운 짐이었음을 그때 절실히 깨달은 거야.
그래서 다신 누구에게도 그런 짐이 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어. 학교를 다닌 이상 이미 교장선생님과 너희에게 부담을 줬지만 졸업하고 서서히 사라지면.. 없던 존재처럼 희미해질 수 있다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받은 만큼 돌려줄 길은 없지만 적어도 부담이나 오점으로 남고 싶진 않으니까..그래서 너희를 피한 거야."
"...무니...무니...이 바보 같은..."
시리우스는 리무스의 머리를 자기 어깨로 끌어와서 안았다. 눈물이 금갈색 머리카락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시리우스의 어깨도 금방 축축하게 젖었다.
"네 아버지에게 네가 어떤 존재였는지 내가 딱 잘라서 말할 순 없겠지. 하지만 절대 널 부담으로, 짐으로 여기지 않으셨을 거야. 그리고 나한테는 절대 넌 그런 존재가 아니야. 내 마음이 어떤지 이미 알고 있잖아. 널 사랑해. 정말로 사랑해. 네가 나랑 같은 마음이 아니어도 괜찮으니까..."
리무스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시리우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 넌 늘 친구 이상이었어. 하지만 더 욕심낼 순 없어. 네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쳐. 나와 이 이상 얽히면......."
바보 같은 소리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시리우스의 뇌는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 리무스의 뒤통수를 감싸 쥐고 입술을 맞대는 것으로 시리우스는 모든 논쟁을 끝냈다. 상대가 말을 못 하게 하려면 입술을 붙이고 혀를 밀어 넣는 것이 최고라는 걸 그날 시리우스는 확실히 체험했다.
7.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한 피터는 카페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달콤한 코코아와 머핀을 즐기고 있었다. 부엉이 살만 뺄 게 아니라 네 살도 빼라는 약혼자의 잔소리를 피해 일부러 빨리 나온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웜테일! 코코아 당분간 끊기로 했잖아. 내가 보낸 마링차 마시고 몸 관리하겠다더니."
"무니 이 잔소리꾼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야? 아직 머핀 두 개밖에 못 먹었는데..."
"네 약혼자가 무니에게 특별히 부탁했거든. 너 몰래 먹지 못하게 감시해달라고."
어느새 뒤에서 나타난 시리우스가 피터 손에서 머핀을 낚아챘다. 즐거움을 빼앗겨 축 늘어진 피터가 투덜거렸다.
"쳇, 여자들은 왜 이렇게 무니를 좋아하는 거야. 무니는 정작 여자한테 관심도 없는데."
"그렇지. 무니가 그나마 관심 있는 건 오직 나뿐이지. 시리우스 블랙이 들이대는데 다른 사람이 눈에 차겠어?"
능글맞게 눈을 찡긋거리며 머핀을 혀로 야하게 핥아대는 시리우스를 보며 피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석 달 전만 해도 걸어다니는 시체 꼴이던 놈이... 프롱스가 릴리 따라다닐 때도 정말 드러운 꼴 많이 봤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리무스가 테이블 밑으로 시리우스를 걷어차는데 제임스가 헐레벌떡 나타났다. 평소보다 흥분한 기색으로 달려온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봉투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야, 패드풋! 너 이거 뭐야? 왜 스네이프가 나한테 너 주라고 물건을 맡기고 가는 거야? 엉?"
"걔 일하는 연구소가 너희 회사 근처라 너한테 맡기라고 했어."
"이게 뭔데? 스네이프랑 왜 연락한 거야?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어?"
제임스가 다그치거나 말거나 시리우스는 태연하게 봉투를 열고 안에서 옅은 녹색 액체가 담긴 작은 유리병 여러 개를 꺼냈다. 병 하나를 집어 뚜껑을 열자 은은한 차 향기가 풍겼다. 시리우스가 답지 않게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리무스에게 병을 내밀었다.
"냄새 맡아봐. 네가 좋아하는 애프로 잎 향 넣은 거야."
의아한 표정으로 향을 맡은 리무스가 병을 돌려주며 물었다.
"향 좋네. 근데 차를 왜 병에 담은 거야?"
답답함을 참지 못한 제임스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 차를 왜 스네이프가 준 거야?"
"그냥 차가 아니고... 울프스베인이야. 너 지금 마시는 건 냄새가 독해서 구역질도 하고 그러니까 속상해서... 스네이프한테 찾아가서 부탁했더니 결국 완성품이 나왔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건 애프로 잎에 든 진통제 성분이 울프스베인 효능을 높여서 변신할 때 통증을 줄여준대."
시리우스의 대답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네이프한테 부탁을 했다고?"
"헐... 스네이프가 그 부탁을 들어줬어? 맨입으로?"
시리우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맨입은 아니고... 연구비 좀 대고, 가서 잡일 좀 거들고, 스네이프한테 아첨도 좀 하고.. 뇌물로 제임스네 회사 신상샴푸 몇 박스 갖다 바쳤지. 걔네 연구소에서 이 향기로운 울프스베인을 상품으로 출시할 거라기에 내가 잘생긴 얼굴로 무료 광고 모델하기로 했어. 다음 주쯤에 예언자 일보에 실릴 거니까 놀라지들 마."
"맙소사.. 샴푸는 언제 훔쳐다 바친 거야? 이 자식, 우리 집 찬장 좀 그만 털라니깐."
"네가 모델하면 불티나게 팔리겠구나. 이거 그냥 건강음료로는 못 마시나?"
제임스와 피터가 울프스베인을 들여다보며 경악과 감탄을 금치 못하는 동안 리무스는 아무 말이 없었다. 시리우스는 긴장한 표정으로 리무스를 조심스레 살폈다. 상의도 없이 너무 많은 일을 벌였나? 밀어붙이지 않기로 해놓고 너무 부담스럽게 군 걸까?
온갖 걱정이 머리를 스치는 사이에 리무스의 마른 손이 가만히 시리우스의 뺨에 닿았다. 시리우스가 너무나 사랑하는 갈색 눈동자가 일렁였다. 부드러운 눈동자에 담긴 수많은 감정 속에서 시리우스는 자신이 애타게 찾던 것을 보았다. 둘의 기류를 눈치 챈 제임스와 피터가 머핀 접시와 코코아 잔을 들고 옆 테이블로 도망치는 동안 둘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입술이 맞닿는 순간 리무스는 시리우스가 그토록 바라던 말을 속삭였다.
"사랑해, 시리우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