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무]관찰자 12
관찰자 12
- 해리포터 시리무 팬픽입니다. bl 싫어하시는 분들께는 적합하지 않아요.
한밤의 난투극 이후 시리우스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건드리지 말라는 어둠의 기운을 내뿜으며 다니던 때가 언제였냐는 듯 다시 특유의 오만하고 장난기 어린 분위기로 돌아갔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단순한 변덕으로 보였을지 모르나 제임스 포터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리무스는 도서관에 가고 피터는 곱스톤 모임에 나가서 방에는 검은 머리 소년 둘만 남아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 비스듬히 기대어 퀴디치 잡지를 뒤적이던 제임스는 콧노래를 부르며 욕실에서 나오는 시리우스를 향해 피식 웃었다.
"자식, 그렇게 속이 시원하냐?"
"뭐가?"
"펜위크한테 무니 좋아한다고 얘기한 거 말야. 그 말이 얼마나 하고 싶었으면 사흘이나 주먹만한 코를 달고도 실실대고 다녔냐."
시리우스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게. 하고 싶은 말 하고 나니까 후련하긴 하네. 입맛도 좋아지고 피부도 다시 매끈해지고 말이야. 이번에 네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다, 친구."
"무슨 소리야?"
"에반스한테 허구헌날 차이면서도 들이대는 이유를 알 것 같단 말이지. 너야말로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사니 번번이 차이면서도 늘 기분 좋게 지내는 거 아니겠어?"
"그 코 다시 키우고 싶은 모양이다, 너."
제임스가 던진 베개를 낄낄대며 피한 시리우스는 제임스가 바닥에 쌓아놓은 퀴디치 잡지를 한 권 집어들고 자기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잠깐의 침묵 후 제임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기분 좋아지니까 무니 얼굴도 밝아진 것 같아."
잡지 너머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음 소리만 들려왔다.
"아까 마법약 시간 끝나고 여자애들이 너 요새 계속 만나는 사람 있냐고 물어보더라."
"데이트 안한 지 꽤 된 것 같은데 뭔 소리래?"
"그러니까 궁금해 하는 거지. 시리우스 블랙이 데이트를 안하니 남몰래 연애 중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남의 일에 쓸데없이 관심 많은 애들이네. 그냥 너도 모른다고 대답해."
"내가 네 일을 모른다고 하면 믿을 것 같냐?"
시리우스가 잡지를 내리더니 제임스를 향해 눈썹을 찡긋거리며 야릇한 미소를 던졌다.
"우리가 그렇게 끈끈한 사이로 보이나? 하긴 우리 사이가 보통은 아니지. 얼굴도 성격도 내 취향은 아니지만 너도 외롭고 나도 외로운데 이 참에 우리 한 번 여자애들의 환상을 충족시켜줄까?"
"안 그래도 저녁 너무 많이 먹어서 토할 것 같으니 느글거리는 소리 집어치워라."
"프롱스, 프로오오옹스. 너야말로 욕구불만이야. 에반스 대신 내가 위로해주지."
벌떡 일어난 시리우스가 셔츠 단추를 풀며 다가오자 제임스는 험악한 발길질로 응수했다. 둘이 주먹다짐하는 시늉을 하며 바닥을 구르고 있는데 피터가 들어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헐떡거리며 서로 우위를 차지하려고 뒹구는 둘의 모습에 피터는 고개를 저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보고 싶은 광경은 아닌데...... 너희 정말 욕구불만 맞나 보다. 펜위크보다 더 심한데."
난리를 치는 와중에도 반갑지 않은 이름을 귀신같이 알아들은 시리우스가 제임스의 배 위에 올라탄 채로 피터에게 눈을 돌렸다.
"펜위크? 그 자식이 왜? 무니한테 뭔 짓을 하고 있는데?"
"너희에 비하면 아무 짓도 안하고 있지. 지금 우리 휴게실에 무니랑 앉아 있어. 도서관에 있다가 같이 숙제하러 왔다는데 래번클로치곤 집중력이 떨어지던데. 책보다 무니 얼굴 보는데 열심이야."
시리우스가 얼굴을 찌푸리며 멈춘 틈을 타 제임스는 얼른 배 위에 앉은 덩어리를 밀어냈다. 피터가 말을 이었다.
"둘이 휴게실에 있는 덕분에 그리핀도르 여자애들 휴게실로 총출동했어. 다들 딴일 보는 척하면서 무니랑 펜위크가 뭐하나 힐끔거리면서 싱글벙글하고 있지. 질리지도 않나봐."
"릴리도 있어?"
"물론이지. 신나긴 앨리스가 제일 신났어. 프랭크는 무관심 속에 버려져 있고."
조용하던 시리우스가 그르릉 소리를 내며 일어서더니 문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아침식사 때 무니 끌고 가는 것도 모자라서 저녁 때 그리핀도르 휴게실까지 나타나다니...거슬려."
"어이, 패드풋! 뭐하려고 내려가? 기다려!"
제임스의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리우스는 방을 나가버렸다. 계단을 쿵쿵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피터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괜히 얘기했나? 요새 기분 좋길래 이제 무니랑 펜위크 일에 별 생각 없는 줄 알았는데......"
"어차피 계속 방에 있을 건 아니었으니까 내려가면 마주쳤을 거야. 나도 내려가 봐야겠다. 너도 갈래, 웜테일?"
"난 씻고 나서 안 졸리면 내려갈게. 중요한 일 있으면 불러."
"오케이."
자신이 없는 틈에 시리우스가 소동이라도 일으킬까 싶어 제임스는 서둘러 휴게실로 내려갔다. 다행히 휴게실은 이야깃소리와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릴리의 빨간 머리카락이 벽난로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앨리스가 그 옆에 앉아 신나게 웃고 있었고, 프랭크는 피터 말대로 방치된 채 졸고 있었다. 앨리스의 시선을 따라가자 리무스 커플이 보였다. 둘은 휴게실 창가 옆의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리무스가 무릎에 놓인 책을 가리키며 무슨 말을 하고 있었고, 펜위크는 불편할 정도로 리무스에게 얼굴을 바싹 대고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시리우스를 찾으려는데 바로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시리우스가 벽에 기댄 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자식, 나랑 밤에 한 판 붙은 이후로 엄청 공격적으로 들이대는데. 보란듯이 말이야."
"오늘은 따라가서 때리지 마라. 무니가 며칠 전에 너희 둘 얼굴이 같은 날 부은 걸 캐묻지 않아 다행이지. 이번에 또 그러면 안 넘어갈걸."
"펜위크가 얌전히 있다 나가면 안 따라가도록 하지."
제임스는 시리우스 옆 벽에 나란히 기대어 섰다. 평온하고 즐거운 휴게실 한쪽에서 남자친구 옆에 앉아 즐겁게 이야기하고 다정하게 웃는 리무스의 얼굴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은 묘한 경험이었다.
늘 늑대인간이라는 무게에 눌려 마루더즈와 릴리 외에는 가까이 지내는 사람을 두지 않았던 리무스, 왜 아무도 사귀지 않냐고 물으면 자기 처지에 너무 큰 욕심이라며 말끝을 흐리던 리무스가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습에 제임스의 마음은 따뜻해졌다. 하지만 리무스가 결국 펜위크에게 늑대인간인 걸 밝히지 못하고 언젠가는 자기 발로 먼저 물러설 것을 알기에 애잔한 마음도 들었다.
시리우스가 자길 좋아한다는 걸 알면 리무스는 어떻게 반응할까? 제임스는 문득 궁금해졌다. 바람둥이라서 믿을 수 없다고 할까? 시리우스 말대로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 상대니 더 좋은 사람을 만나라고 말할까? 아니면 선뜻 나도 널 좋아한다고 대답할까? 이 부분에서 제임스는 고개를 저었다. 마루더즈는 리무스가 처음으로 사귄, 너무나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만일 헤어지는 상대가 펜위크처럼 안 보면 잊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시리우스처럼 중요한 존재라면 리무스는 도저히 그 괴로움을 감당하지 못할 터였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무니와 펜위크가 책을 챙겨서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펜위크가 래번클로 기숙사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둘을 몰래 지켜보던 여자애들의 눈이 기대감으로 빛나는 게 확연했다. 둘이 휴게실을 나서기 전에 굿나잇 키스라도 하길 바라는 듯했다. 조용히 휴게실을 나서는 둘의 모습에 낮은 한숨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자 제임스는 코웃음을 쳤다.
"쳇, 저 둘은 여자한테 관심이 없는데 정작 여자들의 관심을 원하는 남자들은 외면당하는 신세라니. 서글프구만. 난 릴리한테 다정한 밤인사라도 건네고 와야겠다. 패드풋 넌 어떻게 할래?"
"펜위크 안 쫓아갈테니 걱정말고 볼일 봐."
시리우스는 방금 전까지 리무스가 앉았던 자리에 가서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어깨를 으쓱한 제임스는 벽난로를 등지고 앉은 릴리를 향해 다가갔다. 릴리는 평소처럼 퉁명스럽게 굴었고 제임스는 개의치 않고 느끼한 작업문구를 남발했다. 둘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앨리스와 졸다 깬 프랭크가 대화에 합류했다. 한동안 그러고 있다 시리우스 쪽을 문득 돌아보니 언제 돌아왔는지 리무스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제임스나 피터 없이 둘이 저렇게 평온한 표정으로 함께 있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시리우스만 보면 긴장으로 굳어지던 리무스가 시리우스와 눈을 마주하고 편안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웃음 띤 금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시리우스의 눈에도 행복한 빛이 가득했다.
"블랙이 마음을 고쳐 먹은 모양이네."
릴리가 제임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제임스는 말없이 빙긋 웃었다.
- 13장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