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무] 관찰자 23
관찰자 23
- 해리포터 시리무 팬픽입니다. bl 싫어하시는 분들께는 적합하지 않아요.
아직 대다수가 호그스미드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돌아다니는 저학년들도 거의 없어 학교는 아주 조용했다. 방에 올라가 지도를 펼치는 게 빠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급한 마음에 제임스는 뚱보여인 초상화 앞에서 바로 천문탑을 향해 달려갔다. 왠지 리무스와 펜위크가 그곳에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천문탑은 윙윙대는 바람 소리만 가득할 뿐 사람 그림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제임스는 혼잣말을 했다.
"빈 교실들을 둘러봐야 하나? 근데... 무니를 막상 찾는다 해도 어떻게 할지는 생각 안해봤는데... 옆에 있기도 그렇고... 일단 펜위크를 떨쳐내고 봐야하나?"
뚱보여인의 말대로 펜위크가 리무스를 덥석 잡아서 끌고 갔다면 뭔가 알고 있거나 적어도 수상한 낌새를 느낀 게 틀림없었다. 안 그래도 죄책감에 시달리는 애를 들들 볶다 덤블도어에게 끌고 간다던지, 뛰쳐나가서 온 학교에 소문을 낸다던지 하면... 제임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최악의 상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리무스 정체가 드러나서 퇴학이라도 당하면... 혹은 더 이상 폐를 끼칠 수 없다며 리무스가 자기 발로 호그와트를 나간다면... 계단을 모두 내려와 복도로 들어서는 제임스의 발에 한층 더 속도가 붙었다. 일단 둘을 찾고 동태를 살피는 게 최선이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지도가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그리핀도르 기숙사로 향했다. 1초라도 딴짓을 하는 사이에 무슨 일이 날 것 같아 앞을 살필 겨를도 없이 뛰다시피 걷던 제임스는 모퉁이를 돌다 마주 오던 사람과 세게 부딪혔다. 뒤로 몸이 휘청하는 순간 상대의 손이 뻗어나와 팔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젠장, 프롱스! 지금 드러누울 시간 없으니까 빨리 가자!"
"패드풋! 지금 지도 찾아야 돼! 펜위크가 무니를 데려갔다구!"
시리우스가 망토 주머니 위로 살짝 나온 지도를 두드려 보였다.
"펜위크가 리무스를 끌고 금지된 숲 쪽으로 가고 있어. 많고 많은 곳 중에 거기로 가는 걸 봐선... 그 잘난 아버지가 뭔가 흘렸거나 펜위크가 냄새를 맡았거나 둘 중 하나야."
"젠장할...!"
발바닥에 불이 붙는다는 말이 딱 어울릴 만큼 둘은 금지된 숲을 향해 미친듯이 달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눌리는 거대한 나무들이 어두운 기운을 뿌리며 빽빽이 늘어서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제일 가까운 나무에 몸을 기대고 잠시 숨을 고른 후 둘은 조심스럽게 숲으로 들어섰다. 제임스가 속삭였다.
"깊이 들어가진 않았을 거야. 펜위크가 뭔가 눈치챘다면 특히."
입술을 앙다문 시리우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리무스와 펜위크를 찾았을 때를 대비해 바로 몸을 숨길 수 있도록 투명망토를 꺼내 움켜쥐었다. 방금 전까지 흐르던 땀은 을씨년스런 숲의 기운 때문인지 벌써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안경을 콧등 위로 밀어올리던 제임스의 눈에 뭔가 포착되었다. 빽빽한 수풀과 굵은 나무기둥 사이로 검은 망토를 걸친 리무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얼른 시리우스의 팔을 잡아 세운 후 몸을 바짝 붙이고 함께 투명망토 아래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리무스의 모습을 확인한 시리우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제임스는 경고의 의미로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진정해, 패드풋. 일단 숨어서 지켜보자구."
이야기 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에 이르자 둘은 몸을 최대한 낮추고 높다랗게 자란 수풀 너머로 상황을 살폈다. 리무스의 얼굴은 입술에서조차 핏기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한참 땅을 바라보고 서 있던 펜위크가 몸을 돌려 입을 열었다.
"갑자기 끌고 와서 미안... 아까 아버지한테 들으니까 아파서 먼저 왔다고 그러시던데... 지금도 많이 안 좋아?"
"아니야. 괜찮아. 이젠... 걱정하지 않아도 돼."
"블랙이 널 데려갔다고 들었어."
고개를 푹 숙인 리무스는 자기 신발 끝에 눈을 고정시키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리우스는... 지나가다 우연히 보고 데려다 준 것 뿐이야. 그보다... 나한테 할 얘기 있다고 했지? 사실 나도 할말이 있어. 먼저...얘기할래?"
"내가 할 얘기는... 그러니까......"
펜위크는 긴 한숨을 내쉰 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은 채 리무스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어도 리무스가 신발 끝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자 펜위크는 뭔가 결심한 듯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서 리무스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커다란 손이 리무스의 창백한 얼굴을 감싸쥐고 천천히 들어올렸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금갈색 눈동자가 파란 눈동자와 마주했다. 제임스는 자기 어깨와 맞닿은 시리우스의 어깨가 단번에 굳는 것을 느꼈다.
"리무스... 난 널 정말 좋아해. 지금까지 이렇게 좋아해본 사람이 없었어. 앞으로도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좋아한다는 말보단 다른 말로 표현하고 싶지만 네가 부담스러워 하니까 그 말은 하지 않을게."
펜위크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제임스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리무스를 아무리 좋아한다고 하지만 시리우스와 경쟁 관계라서 오버하는 면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깊은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리무스가 한 걸음 물러서며 떨리는 손으로 펜위크의 손을 잡아내리려 하는 게 보였다.
"로버트... 나는......"
펜위크는 자기 손을 내리려는 리무스의 손을 움켜쥐고 오히려 더 바짝 다가섰다.
"요즘 나한테 자꾸 이상한 소릴 하는 사람이 있어. 뭔가 암시하는 것처럼... 너에 대해 내가 모르는 이상한...아니 뭔가 무서운 사실이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면서 말야. 난 널 꽤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겉보기엔 조용하고 수줍음 타는 성격이지만 수많은 장난 뒤에 숨은 브레인.
취미는 당연히 독서. 마법 관련 책은 물론 머글 작가들의 책을 엄청 즐겨읽지. 어머니가 머글이라 어릴 적부터 읽은 머글 동화며 시를 지금도 줄줄 외우고.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셰익스피어.
초콜릿이라면 자다가도 깰 만큼 좋아하고. 핫코초에 초콜릿 크래커, 개구리 초콜릿을 같이 먹어도 질릴 줄 모르고.
항상 예쁘지만 보풀이 여기저기 일어난 파란 니트에 하얀 셔츠를 입고 나오면 기절할 만큼 예쁘고... 예쁘면서도 예쁘다고 하면 남자에게 무슨 소리냐고 질색하고...
첫 키스는 슬프게도 내가 아니라 다른 놈이었지만 첫 남자친구는 나. 제일 많이 키스한 것도 나. 눈동자는 평소엔 녹인 캐러멜 같은 빛깔이지만 피곤한 날이면 오래 구운 빵처럼 짙은 갈색을 띠지.
웬만한 일엔 화내지 않지만 친구들 험담은 못 견뎌 하고 순수혈통주의자라면 딱 질색. 하지만 아무리 싫어도 대놓고 욕을 하진 못해. 신기할 정도로 감정을 숨기거나 누르는 경향이 있지. 그렇게 시끄러운 친구들과 다니면서도 주목받는 걸 좋아하지 않고 냉큼 숨어버리고. 남 칭찬은 늘 하지만 자기 칭찬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처음엔 가식인가 싶었는데 원래 자존감이 낮다는 걸 알게 되니까 짠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했어. 자기가 똑똑하다는 걸 너무 잘 알고 그걸 당연하게 드러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온 내겐 네 그런 점이 가장 큰 매력이었어."
온몸에 닭살이 돋을 만큼 다정한 멘트를 들으면서 제임스는 잠시 '내가 왜 여기에 있나?'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시리우스의 코 부근에서 거센 김이 뿜어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그때 애정어린 목소리로 나직하게 이어지던 펜위크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하지만 이걸론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 스네이프가 하는 말 따윈 무시하면 그만이라 크게 신경쓰지 않았어. 그런데 오늘 아버지를 만나고...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어. 내가 게이라는 걸 알았을 때 어머니는 엉엉 우셨지만 아버지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격려해주셨거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꼭 사귀라고, 나중에 만나보고 싶다고 하셨지. 그래서 호그스미드에서 마주쳤을 때 정말 기뻤어. 그런데 심부름을 다녀오고 나니... 아버지의 반응이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어. 넌 도망치듯 가버린 후였고. 그간 스네이프가 뿌린 알 수 없는 씨앗들이 오늘 마침내 싹을 틔우고 말았지.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됐어."
말을 줄줄이 쏟아내던 펜위크는 입술을 꽉 깨물고 하늘을 바라봤다 리무스에게 눈길을 돌렸다. 한 손은 리무스의 어깨에, 다른 한 손은 살짝 구불거리는 옅은 갈색머리에 파묻고 금갈색 눈동자를 응시하는 모습이 무섭도록 심각해보였다. 제임스는 입이 마르는 느낌이었지만 다음에 나올 말이 두려워 침조차 삼킬 수 없었다. 시리우스는 미동도 않은 채 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웃기는 생각이고... 물어볼 가치도 없는 질문이지만... 내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일이라 해도 물어볼게. 무슨 헛소리냐고 비웃고 때려도 좋아. 물어보지 않으면 계속 멍청이 같은 생각이 들 것 같으니까."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리무스의 입술이 벌어졌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리무스... 너... 그거야? 내가 생각하는 그... 하아..."
갑자기 고개를 휘저으며 웃음도 아니고 한숨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낸 펜위크가 리무스의 몸을 그 이상 가까워질 수 없을 만큼 확 끌어당겼다. 목이 졸리는 듯 확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호그와트는 동물원이 아니야. 사람이 다니는 곳이지. 그러니까 네가... 그거일 리가 없어. 이상한 암시에 내가 낚여서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는 거지. 리무스 네가... 늑대인간일리는 없잖아. 그렇지?"
펜위크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오는 순간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리무스의 눈에서 눈물이 뿜어져 나왔다. 하얗게 질린 뺨 위로 흐르는 물줄기에 시리우스가 당장 뛰쳐나가려는 걸 제임스는 온힘을 다해 막았다. 펜위크는 리무스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계속 혼자 주절거리고 있었다.
"그런 자식 헛소리에 정신이 팔리니까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나도 그러고 보면 헛똑똑이지."
"...아니야..."
어깨에 올려진 펜위크의 손에서 벗어나려 뒷걸음질 치며 리무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당연히... 미안해, 리무스. 불쾌하게 해서...몸도 안 좋은데... 널 그런 걸로 생각하다니 내가 미쳤지. 스네이프 자식 단단히 손 봐줄 거야."
자신을 다시 끌어당기려는 펜위크를 피하며 리무스는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로버트... 넌...헛똑똑이가 아니야. 없는 걸 있는 것처럼 느낀 것도...아니야."
나무와 수풀 사이를 헤치고 들어오는 바람소리 외엔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햇볕에 그을려 보기 좋은 갈색이던 펜위크의 얼굴이 순식간에 리무스 못지 않게 하얗게 질렸다.
"거짓말."
"미안해. 로버트. 널 속였어... 미안해..."
제임스와 시리우스가 미처 일어서기도 전에 리무스의 멱살을 잡은 펜위크는 단숨에 망토와 스웨터를 북 찢고 안에 입은 셔츠 단추를 뜯어냈다. 거친 손길이 하얀 목덜미와 쇄골을 스쳤다. 의기양양한 미소가 펜위크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때 리무스의 마른 손이 셔츠를 왼쪽 어깨 아래로 살짝 밀어내렸다. 십년도 전에 펜리 그레이백이 박아넣은 이빨 자국이 창백한 피부 위에 크고 불그레한 흉터로 떠오르면서 펜위크의 미소가 무너져 내렸다. 제임스와 시리우스는 망토를 쓴 채 벌떡 일어서 있었지만 둘 다 못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리무스의 눈물이 펜위크의 손등으로 뚝뚝 떨어졌다. 펜위크는 뜨거운 촛농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부르르 떨며 손을 털어냈다. 애정이 가득하던 파란 눈동자에 순수한 혐오의 감정이 꽉 차올랐다. 당장이라도 리무스를 후려칠 것처럼 손을 번쩍 들었다 입술을 깨물고 뒤로 물러섰다. 래번클로의 창백한 뺨에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 의미는 알 수가 없었다. 목이 졸린 듯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다신... 나한테 가까이 오지 마. 그리고... 다들 잊을 때까지 나와... 사귄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마. 늑대인간이랑 얽혔다는 게 알려지면 난... 성격이 안 맞아서 헤어진 걸로 할테니까... 이제부터 다신 아는 척 하지 마. 나도 네 정체를 밝히지 않을테니까... 그걸로 모든 걸 정리하자, 루핀..."
화낼 기운도 없는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멀어져가는 펜위크와 눈물을 흘리며 멍하니 선 리무스를 번갈아 보며 제임스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불행히도 스네이프의 말이 옳았고 펜위크 씨의 말도 옳았던 셈이었다. 세상은 이상과 달랐고 현실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적어도 늑대인간 리무스 루핀에게는.
- 24장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