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무] 관찰자32
관찰자 32
- 해리포터 시리무 팬픽입니다. bl 싫어하시는 분께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어휴... 이 머저리, 팔푼이......"
쌩쌩 부는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커다란 떡갈나무 아래 홀로 앉은 제임스는 평소보다 훨씬 더 엉망인 머리를 손가락으로 헤집으며 연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은 마구 뒤엉킨 머리털보다 훨씬 더 엉망이었다.
"도대체 왜... 망할 놈의 재채기가... 하필이면 그때 나오냐구? 왜? 왜? 왜?"
머리를 쥐어뜯던 손으로 홧김에 코를 거칠게 잡아당기자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아아아아아악! 젠장할! 더럽게 아프네!"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항상 느끼고 있었지만 드디어 제대로 미쳤구나, 포터."
눈물 고인 눈으로 뒤돌아보니 웃음을 참는 듯한 릴리의 얼굴이 보였다. 제임스는 외투 소매로 눈물을 슥 닦아내고 고개를 돌렸다.
"네 말이 맞아. 내가 미쳤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타이밍에 재채기를 할 수 있겠어......"
어깨가 축 처져서 기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에 릴리는 하려던 농담을 삼키고 제임스 옆에 앉았다.
"재채기는 뭐고, 타이밍은 또 무슨 소리야?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리무스도 블랙도 아침식사 때 안 보이던데. 리무스는 집에서 아직 안 온 거야?"
"그게... 얘기가 좀 길어..."
다시 한숨을 내뿜은 제임스는 릴리에게 밤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릴리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다 시리우스의 고백 부분에서 급격히 달라졌다.
"세상에! 블랙이 리무스한테 사랑한다고 했단 말이야? 진짜로? 드디어? 완전 멋지다! 그래서 리무스는 뭐라고 했어? 나도 너 좋아한다고 솔직히 말했겠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대답을 기다리는 릴리를 보고 제임스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리무스 대답은 못 들었어."
기대로 가득했던 미소가 릴리의 얼굴에서 단숨에 빠져나갔다.
"리무스가 사랑 고백을 듣고 대답을 안했다구? 딴 사람도 아니고 블랙이 한 고백인데?"
살짝 부어서 벌겋게 달아오른 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제임스는 느릿느릿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말야, 내가... 무니가 대답하기 직전에 재채기를 했거든. 엄청 크게... 그래서 산통이 깨졌달까......"
예상치 못한 황당한 대답에 릴리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콧구멍에서 재채기가 터져 나가던 그 순간을 돌이켜보며 제임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랑해. 난 널 사랑하고 있어, 리무스 루핀."
지난 몇 년을 찰싹 붙어다니면서 절친의 진지한 모습을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나 그 순간처럼 진실하고 심각한 시리우스의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오랜 시간 참고 숨겨온 진심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목소리에 제임스는 가슴이 뭔가로 찌르는 듯 아프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이제 리무스도 자기 진심을 털어놓고 둘이 알아서 행복의 나라로 가면 되겠지. 근데 저 자식들이 내 침대에서 키스하거나 더한 짓이라도 벌이면..... 리무스의 대답을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이 제임스의 머리를 스쳐갔다. 왜 대답이 없지? 빨리 너도 좋아한다고 말해, 무니! 제임스는 실눈을 뜨고 친구들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런데 전혀 간지럽지 않던 코에서 그 순간 뜬금없이 엄청나게 심한 재채기가 터져나왔다.
"에~~~~~~~~~~~취!!!!!!!!"
딱 한 번의 재채기였지만 시리우스와 리무스는 물론, 자고 있던 피터까지 놀라 벌떡 일어날 정도로 무지막지한 소리가 방안에 울려퍼졌다. 제풀에 놀란 제임스는 재채기가 끝나기 무섭게 입을 손으로 틀어 막았지만 이미 애절한 고백의 분위기는 산산조각난 뒤였다. 피터는 잠시 눈을 번쩍 떴다 1초 만에 쓰러져 다시 잠들었고, 리무스는 창백한 얼굴
로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일생일대의 순간이 깨진 시리우스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제임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미, 미안해. 둘이 하던 얘기 마저 해. 아, 물론 나는 무슨 얘긴지는 모르지만... 난 신경쓰지 말고... 난 지금 깼으니까 곧바로 다시 잔다. 아하하..."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며 자는 척 하려고 몸을 돌려 누우려는데 시리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럴 거 없어. 지금은 얘기 다 끝났으니까."
"뭐? 하지만......"
아직 대답을 못 들었잖아! 솟아오르는 말을 목구멍 밑으로 누르면서 제임스는 다시 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리우스가 숨을 깊게 몰아쉬고는 리무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대답은 나중에 들을게. 일단 눈 좀 붙이도록 해. 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으니까."
그러고 나서 시리우스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빠르게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무 움직임 없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리무스는 문이 닫히자 제임스를 향해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잘자, 프롱스..."
조용히 닫히는 리무스의 침대 커튼을 물끄러미 보며 제임스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땅이든 침대든 뭐라도 갈라져서 자신을 통째로 집어삼켜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시리우스는 그때 나가서 아직까지 못 봤고... 리무스는 방에서 안 내려왔어. 커튼이 그대로 닫혀 있길래 자라고 놔뒀지. 어쨌거나 이렇게 일이 찝찝하게 된 건 다 내 잘못이야."
괴로움에 머리를 다시 쥐어뜯는 제임스를 보며 릴리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자책할 필요 없어. 듣고 나니까 오히려 재채기하길 잘한 것 같은데..."
"그렇게 오래 끙끙 앓던 일이 해결되려던 참에 상을 엎은 꼴인데 잘했다니 말도 안돼."
"들어 봐. 나도 아깐 마냥 신나서 해피엔딩을 기대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네가 재채기를 안 해서 이야기가 이어졌다 해도 리무스가 블랙한테 솔직하게 좋아한다고 대답했을 것 같진 않아.
로랑이 블랙 약혼자라고 나타난 거나 그레이백이 리무스네 집을 뒤집어 놓은 거, 그리고 펜위크와의 일까지 생각하면... 게다가 블랙 부인이 다음엔 무슨 짓을 저지를 지 모를 일이고. 아들 친구 집에 늑대인간을 보내 협박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아들도 해코지하고 남겠지. 그러니 리무스 입장에선 자기랑 엮이면 블랙에게 어떤 면에서도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아."
차분한 릴리의 말에 제임스 역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리우스에게 그토록 꿈꿔왔던 고백을 받았다 해도 리무스가 그 마음을 받아들이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서로 사랑하는데 늑대인간이든, 약혼자든, 미친 어머니든 다 무시하고 그냥 밀어붙이면 안 되는 건가? 릴리의 짧은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제임스는 자신이 큰 소리로 그 말을 내뱉었다는 걸 알았다.
"리무스가 그렇게 밀어붙일 수 있는 성격이었으면 벌써 블랙이랑 사귀었지. 리무스가 겪는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혼혈이란 이유로 차별 당할 때가 많으니까 리무스가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거든. 나 같아도 블랙이랑 덥석 사귀지 못했을 거야.
너나 블랙은 그런 상황을 겪어보지 않았을테니 이해하기 쉽지 않을 거야. 자기가 상대방보다 부족한 게 너무 많다고 느끼면 마음을 열기 힘들어."
씁쓸한 그 목소리에 제임스는 고개를 돌려 릴리를 바라보았다.
"나나 시리우스도 구멍투성이야. 부족한 걸로 따지면 리무스나 너보다 한참 부족하지. 우린 뭐랄까... 요란하게 다니는 걸로 부족함을 가리고 있을 뿐이라구. 그래서 우리의 빈 곳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에게 끌리는 거 아니겠어? 너나 무니처럼 말야."
"블랙에게 리무스는 그런 존재인 것 같지만, 너에게 내가? 글쎄. 어제 보니 절세미녀랑도 꽤 잘 어울리던데?"
은근히 심술이 묻어나는 말투에 제임스는 씩 웃었다.
"질투하는 거야? 내가 워낙 매력남이니 로랑이 첫눈에 반했다 해도 놀랍지 않지만, 어제 말했다시피 내 마음은 늘 네 차지니까 조금도 걱정할 필요없어, 나의 백합."
장난기를 되찾은 제임스의 목소리에 릴리는 코웃음을 쳤다.
"진짜야. 물론 꽤 예쁘긴 했지만 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구. 그리고 난 네 얼굴만 보고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그럼 뭘 보고 좋아하는데?"
반짝이며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녹색 눈동자를 보자 제임스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문득 어제 리무스와 나눈 대화가 머리를 스쳤다. 숨을 크게 내쉬고 제임스는 릴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당당하고 곧은 네 마음이 좋아. 옳지 않은 일에는 용감하게 바른 말을 하고 오만방자한 놈들에게 절대 굽히지 않는 모습이 좋고. 넌 정말 멋진 사람이야, 릴리. 난 네 얼굴이 지금과 달라도 널 좋아했을 거야. 넌 대단한 마녀지만, 마녀가 아니라 머글이었어도 분명 좋아했을 거고.
내가 도에 지나치는 행동을 하면 내 얼굴에 대고 시원하게 주먹을 날려주는 것마저 정말 좋아. 아,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맞는 걸 즐긴다는 뜻은 절대 아니야. 그런 쪽으로 변태는 아니거든. 그치만... 물론 네가 원하면 기꺼이 맞아줄 수는..."
"닥쳐, 포터."
거친 대답과는 달리 릴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 제임스의 뺨에 닿더니 미소를 머금은 입술이 제임스의 입술에 살짝 닿았다 이내 떨어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제임스의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기에는 충분했다. 모든 감각이 사라지고 릴리의 입술이 닿았던 곳만 불타는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가출했던 정신을 돌아오게 한 것은 굉장히 친숙한, 그러나 이 순간만은 정말 반갑지 않은 절친의 목소리였다.
"그래. 난 한 마리 들개처럼 외롭지만 다른 사람이라도 행복해야지."
뺨이 살짝 붉어진 릴리가 벌떡 일어났다.
"그럼 난 가볼게. 나중에 봐, 포터. 그리고 블랙."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걸음으로 사라진 릴리의 자리에 시리우스가 와서 앉았다.
"축하해, 친구. 드디어 운명의 그녀와 입술을 마주대는 사이가 됐구만."
간신히 눈의 초점을 맞춘 제임스는 시리우스의 얼굴을 보며 바보같은 웃음을 지었다.
"너도 봤지? 릴리가 나한테 뽀뽀를 하다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으흐흐흐..."
"꿈이 너무 소박하잖아. 이왕 시작한 거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죽어야 여한이 없지."
안경을 밀어올리며 제임스는 눈을 빙글 굴렸다.
"네가 조금만 천천히 나타났으면 한 번 더 뽀뽀해줬을지도 모르지. 암튼 널 보니 이게 꿈이 아닌 건 분명하네. 그나저나 패드풋... 밤엔 미안했어. 숨도 최대한 조용히 쉬고 있었는데 망할 재채기가 하필 그때 터져서..."
시리우스는 고개를 몇 번 젓고 차가운 땅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차라리 다행이었어. 무니 표정이 딱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받을 수 없어.'라고 말하기 직전이었거든. 네 재채기 덕분에 즉석에서 차이는 건 면한 셈이지."
진짜 릴리 말이 맞았네. 제임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친구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고 그런 엄청난 고백을 받은 무니가 못 들은 척 넘길리는 없잖아. 오늘이든 내일이든 언젠가는 얘기해야 할텐데... 무니가 안된다고 하면 포기할 거야?"
"날 그런 쪽으로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포기해야겠지만, 자기가 늑대인간이라 안된다고 한다면 절대 포기 못하지. 사실 크리스마스 때 그리몰드 광장에서 모든 걸 다 해결한 후에 고백할 계획이었는데... 얘기하다 보니까 울컥 치밀어서 홧김에 고백한 거라 말하고나선 무니가 바로 대답하는 게 더 두려웠어. 네 코 덕에 잠깐 시간 벌었지."
제임스는 아까 구박하며 잡아당겼던 코를 무심결에 살살 쓰다듬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집에 가서 뭘 어쩔 생각이야?"
"마님께서 다신 무니나 너희에게 정신 나간 짓 못 하도록 정리하고 올 거야. 맞아도 내가 맞고, 죽어도 내가 죽어. 이번에 무니랑 무니 부모님을 끌어들인 건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열받는 거야 당연하지만 경솔하게 굴진 마. 무니가 제일 걱정하는 건 그러다 네가 다치는 거야. 이번에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자기 잘못이라고 괴로워할 게 분명해."
"걱정시키긴 싫지만 미치광이 어머니를 상대하려면 극단적인 방법 밖엔 없어. 하나만 물어보자. 내가 만약에... 갈 곳이 없어지면 너희 집에 잠깐 신세질 수 있을까?"
제임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집에 머무는 거야 당연히 아무 상관없지! 집 나오려고? 너희 어머니가 짐 싸는 거 가만히 지켜볼 분은 아닐텐데?"
"살아서는 못 나오게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대로 사는 것보단 죽어서라도 나오는 게 나으니까."
쭉 뻗은 시리우스의 다리를 걷어차며 제임스는 버럭 성질을 냈다.
"자꾸 죽는다는 소리 꺼내지 마! 기분 찝찝하게... 너 행여라도 죽으면 나한테 죽는다. 뭔 소린지 알지?"
제임스의 짜증에 시리우스는 피식 웃었다.
"걱정 접어둬. 난 아직 내 사랑과 키스 한 번 못해봤는데 억울해서라도 죽을 수 없지."
"제발 둘이 잘 되서 키스 실컷 해라. 야, 근데 내 침대에선 절대 안돼! 웜테일 침대까진 상관없지만."
"그렇다면 특별히 첫 키스를 네 침대에서 해야겠다."
낄낄대는 친구의 다리를 한 번 더 걷어차며 제임스는 바람에 일렁이는 호수로 눈을 돌렸다. 내일이면 크리스마스 휴가를 위해 대다수 학생들이 집으로 떠나고, 모레는 보름달이 뜨는 이브, 그 다음날에는 블랙 가의 크리스마스 파티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어머니와 별난 약혼자, 미친 순혈주의자들로 가득할 파티에서 친구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이 제임스의 마음을 뒤덮었다.
- 33장에서 계속
- 업뎃이 너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비루한 글을 어떻게든 끝내려다 보니 아주 자판으로 똥을 싸고 있습니다.ㅠㅠ 그래도 기다려주시고 읽어주시는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완결은 꼭 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