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내를 떠들썩하게 만든 연애였던만큼 리무스와 펜위크의 끝은 시작만큼이나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처음 며칠은 두 사람 중 하나가 바람이 났다느니, 잠자리에 문제가 있었을 거라느니 하는 근거없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당사자들의 무반응에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그렇다고 모두 예의를 지켜 남의 연애사에서 관심을 끊은 것은 아니어서 두 사람 앞에서 노골적으로 상대의 이름을 거론하며 깐족대거나 치근덕거리는 무리가 (대부분 슬리데린에) 남아 있었다. 잠자코 돌아서는 리무스와는 달리 마루더즈는 주먹이나 주문을 당장 발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자기 때문에 시비에 휘말리지 말아달라는 리무스의 간곡한 부탁 때문에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
다행히 마루더즈가 화병이 나기 전에 무례한 파리들 중 한 마리에게 본보기로 벌을 내릴 기회가 왔다. 어느 아침식사 시간, 리무스의 앞을 막아서서 자기가 펜위크보다 더 만족시켜 줄테니 한 번 해보자는 말을 내뱉은 슬리데린 5학년의 정강이를 릴리가 연회장 한가운데서 무자비하게 걷어찬 것이었다. 어찌나 세게 찼는지 릴리의 가죽구두 앞코가 슬리데린의 뼈와 강하게 접촉하는 소리가 온 연회장에 울려퍼질 정도였다. 귀가 아프도록 울리는 처참한 비명에 슬리데린 학생들은 적어도 릴리에게 벌을 내리거나 기숙사 점수를 깎을 거라 기대하며 맥고나걸 교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맥고나걸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무례한 하급생에게 예의를 가르치는 것도 반장의 의무죠."라며 슬러그혼 교수를 흘깃 쳐다보자, 토실한 볼 가득히 베이컨을 밀어넣고 있던 그는 동의하는 듯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실망으로 술렁이는 슬리데린 테이블을 바라보며 제임스는 유쾌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나의 백합이야. 아름다운 정의의 여신, 불의를 심판하는 초록눈의 천사, 의리를 수호하는......"
"에반스랑 결혼하는 놈은 뼈도 못 추리겠군. 발 힘이 저 정도면 주먹도 정말이지 대단하겠어. 오늘 보니 종아리 근육이 굉장하네."
황홀경에 빠져 있던 제임스는 순간 고개를 휙 돌려 친구를 노려보았다.
"패드풋 이 자식, 네가 왜 릴리 다리를 쳐다봐? 미친 거 아냐?"
옆에서 흥분하거나 말거나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시리우스는 토스트를 질겅질겅 씹으며 대꾸했다.
"에반스의 놀라운 킥을 본 사람이라면 다들 그 위에 붙은 종아리도 봤을걸. 결국 거기가 힘의 원천 아니겠냐. 주먹 힘이 궁금한 건 나만이 아닐 거야."
건너편에 앉은 피터가 거들었다.
"에반스 손 힘도 장난 아니지. 지난 학기에 제임스가 여학생 침실 앞까지 기어올라가서 세레나데 부르려다 뺨 제대로 맞은 거 기억 안나?"
"하하하하하, 웜테일 네 말이 맞아! 어떻게 그걸 까먹고 있었지? 진짜 웃겼는데......"
떠오르는 기억에 시리우스와 피터가 배까지 움켜쥐고 낄낄대자 제임스는 분개해서 으르렁거렸다.
"친구도 아니야, 네 놈들은. 그때 입속까지 부어오를 정도로 아팠다구!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쑤셔온다."
제임스가 몸서리를 치며 예전에 맞은 부위를 문지르고 있는데 리무스가 피터 옆으로 와서 앉았다. 정강이를 걷어차고도 분이 안 풀려 슬리데린 테이블을 노려보는 릴리를 진정시키고 온 터였다. 피터가 호박주스잔을 리무스 앞으로 밀어주었다.
"식사시간 얼마 안 남았어. 수업 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먹어."
"고마워, 피터. 그리고... 다들 나 때문에 신경쓰게 해서 미안해. 오늘은 릴리까지 곤란해질 뻔 했어."
가볍게 한숨짓는 리무스를 보며 제임스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너한테 하는 말이 아니었어도 화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어. 매를 스스로 부르는데 어쩌겠어. 아까 그 새낀 저질 중에서도 최상급이야."
"그래도 나 때문에 너희가 이 이상 피곤해지는 건 싫어. 내가 자초한 일이니까 화를 내도 내가 내고, 곤란한 일을 겪어도 내가 감당해야 맞아. 릴리에게도 부탁해뒀어. 내 일에 너무 마음쓰지 말라고. 그러니까 너희도 빈정대는 소리 들리는 거 어지간하면 무시하고 넘어가줘.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괜찮아질거야."
제임스가 반박하려 입을 열기도 전에 포크가 식탁 위로 거칠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식탁 너머로 뻗어나가는 매서운 눈빛이 느껴졌다. 의자를 거칠게 밀고 일어난 시리우스가 식탁 너머로 리무스의 팔을 잡아 끌었다.
"나와. 얘기 좀 해."
살벌한 분위기에 순간 당황한 제임스는 연회장 문으로 나가는 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피터가 고갯짓으로 따라가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급히 나가 보니 연회장과 가까운 층계참에서 마주 보고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추궁하는 듯한 시리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항상 자기 탓에 자기 혼자 해결하겠다는 소리지. 그 버릇 뼛속까지 달라붙어서 못 고치는구나. 네가 연애를 한 게 잘못이야? 그게 온갖 모욕적인 언행을 참고 견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해?"
입술이 하얗게 되도록 꽉 깨물고 있던 리무스는 고개를 숙여 시리우스의 눈길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연애가 잘못이란 뜻이 아니라는 거 잘 알잖아. 내가 저지른 잘못에 비하면 이런 일쯤은......"
"네가 뭘 잘못했는지 난 모르겠어. 전혀 모르겠으니까 그 생각을 나한테 강요하지마. 남들이 다 하는 연애, 다 하는 실수, 다 하는 잘못, 너도 한 번쯤 할 수 있는 건데 왜 그렇게 남한테는 관대하면서 자신한테는 빡빡하게 굴어? 뭐든 고맙고 미안하고...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건 없고... 너한테 너는 대체 무슨 의미야? 상대가 친구건, 애인이건 다 널 짐으로 여긴다고 생각해?"
"누구보다 내 자신에게 부담스런 존재가 나야. 나도 내가 부담인데 다른 사람들에겐 어떨 것 같아? 내 존재가 얼마나 괴로움을 주는지... 한동안 속 편히 잊고 있었어. 학교에 오기 전까진 부모님을 보며 매일 느꼈는데... 여기서 너희와 지내면서 행복에 눈이 멀어 잊고 있었던 것 뿐이야. 그래서 나도 남들처럼 될 수 있다고 잠시 착각한 거야. 그뿐이야. 허상은 깨지게 되어 있고, 거짓말은 들통 나게 되어 있어. 난 내 착각과 잘못에 대한 벌을 받는 것 뿐이고. 그러니까... 너도 날 정말 위한다면 내가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도와줘."
말이 이어질수록 리무스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지고 갈라졌다. 화가 나서 굳어있던 시리우스의 얼굴이 안타까움으로 일그러졌다. 검은 머리 소년의 커다란 손이 갈색머리 소년의 마른 팔을 움켜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모든 걸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 남들이 누리는 걸 너도 누릴 자격이 있는데 왜 아니라고만 해?"
"잠깐의 환상 뒤에 찾아오는 현실이 너무 괴로우니까... 가질 수 없는 걸 가질 수 있다고 믿는 게 얼마나 헛된 일인지 알았으니까... 이 정도로 끝난 게 고마울 뿐이야. 만일 잃어버린 사람이 로버트가 아니라 ㄴ......"
리무스가 갑자기 말을 끊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자기 말에 스스로 놀란 눈동자가 보름달보다 더 둥그렇게 커졌다. 하마터면 시리우스에 대한 진심을 얘기할 뻔 했다는 것을 깨닫고 제임스 역시 놀라서 몸이 굳었다. 뭔가 중요한 부분에서 이야기가 끊겼다는 사실을 눈치 챈 시리우스가 리무스의 턱을 위쪽으로 들어올렸다.
"하려던 말이 뭐야?"
턱에 닿은 손을 밀어내는 리무스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방금 전까지 핏기가 없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나 먼저 갈게. 연회장에 들어갔다 와야 해. 가방을 두고 와서......"
빠르게 몸을 돌린 리무스의 눈이 제임스와 마주쳤다. 토마토처럼 익은 얼굴을 푹 숙인 채 리무스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제임스 옆을 스쳐 연회장 쪽으로 사라졌다. 제임스는 느릿느릿 발을 옮겨 시리우스와 나란히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쉽지 않겠어. 무니가 이번 일로 마음을 더 꽁꽁 닫은 것 같아."
"날 봐줄 때까지 기다릴 거야. 무니가 아무리 똥고집이어도 시간 앞에선 버틸 재간이 없을테니."
"옆에서 보는 내가 속 터져 폼피한테 실려갈 지경이다. 어지간하면 계획이라도 짜서 속도 좀 내보자구."
시리우스의 입에서 한숨 섞인 웃음이 짧게 터져나왔다.
"저렇게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애한테 어떤 계획이 먹힐 것 같아? 지금 같아선 내가 죽을 병에 걸렸으니 저 세상 가기 전에 너랑 사귀고 싶다고 하지 않는 한 받아줄 분위기가 아니야. 아야! 머리는 왜 때리고 난리야?"
"쓰잘데기 없는 소리나 지껄이니까 맞는 거야. 너희 둘 다 너무 비관적이라 짜증나려고 하니까 그딴 대답은 집어치워. 이제 곧 크리스마스야. 사랑과 행복이 넘쳐야 할 시기가 오는 거지. 올해엔 다른 선물 필요없고 너희 둘이 사귀어서 12월 31일 자정에 키스하는 게 이 제임스 포터 님 소원이다. 그러니까 제발 소원 좀 들어주라. 알았냐?"
맞은 곳이 아픈지 손으로 문지르며 투덜대는 시리우스를 보며 제임스는 씩 웃었다. 연회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벽에서 몸을 떼는 두 사람 앞에 검은 머리 소년이 나타났다. 시리우스와 닮은 귀족적인 얼굴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표정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머리를 문지르던 시리우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