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자 36
- 해포 시리무 팬픽입니다. bl 싫어하시는 분께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머글들로 가득한 런던 한복판의 카페는 시끌벅적했다. 카페 한쪽의 칸막이 자리에 앉은 세 친구는 긴장한 얼굴로 출입구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꾸 입이 바짝 마르는 느낌에 제임스 포터는 뜨거운 차를 세 잔째 벌컥벌컥 들이켰다. 맞은편에 앉은 피터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벌써 20분이 지났는데.. 나온다고 했으니 오겠지? 길을 못 찾아서 늦나?"
"오겠지. 올 거야. 안 오면 지금 머무르는 집으로 우리가 찾아가는 수밖에."
올 거라고 대답은 했지만 이상한 불안감에 제임스는 속이 울렁거렸다. 옆에 앉은 리무스는 출입구와 찻잔만 번갈아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소리없이 찻잔을 두드리는 손가락에서 초조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들은 지금 친구의 예비 약혼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시리우스를 구하려면 무엇보다 카트린느 로랑의 도움을 구해야 했다.
제임스가 네 번째 차를 들이켜고 찻잔을 내려놓는데 드디어 로랑이 카페에 나타났다. 털모자와 목도리로 얼굴을 거의 가리고 있었지만 장난기 어린 푸른 눈동자는 숨길 수 없었다. 셋은 벌떡 일어나 로랑을 맞았다. 뛰어오기라도 했는지 숨을 몰아쉬며 로랑이 피터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늦어서 미안해. 어휴... 기다리다 갔을까봐 얼마나 급히 왔는지 어지럽네.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고 로렌스 부인이 하도 붙잡고 안 놓아주는 바람에 낮잠 잔다고 거짓말하고 2층 창문으로 몰래 나오느라 오래 걸렸어."
숨을 몰아쉬며 다리를 쭉 뻗는 로랑을 보며 제임스는 고개를 저었다.
"2층 창문? 그 긴 코트에 높은 구두를 신고 어떻게 내려온 거야? 대단하다."
"코트랑 구두는 미리 던져놓고 기어내려왔지. 집에서도 자주 하던 일이라 익숙해. 그나저나 날 불러낸 걸 보면 중요한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야? 혹시 제임스 네가 데이트 신청이라도 한 건가 기대했는데 셋이 나온 걸 보니 아쉽게도 그건 아닌가 보네."
로랑의 능글맞은 미소에 세 소년의 긴장한 얼굴이 조금씩 풀렸다. 조용히 앉아 있던 리무스가 로랑과 눈을 맞추고 입을 열었다.
"정말 중요한 부탁이 있어. 무례한 부탁인 거 알지만 염치 불구하고 얘기할게. 시리우스와 약혼하러 먼 길을 온 네게 할 소리가 아니지만 부디 용서해주길 바라. 제발... 시리우스와 약혼하지 말아줘."
장난기가 싹 사라진 푸른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몇 초간 리무스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로랑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생각보다 훨씬 엄청난 부탁인데.. 네 말대로 난 블랙과 약혼하려고 프랑스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약혼하지 말라는 부탁을 왜 들어줘야 하지? 더구나 이건 가문과 가문의 약속인데 말이지."
갑자기 속에서 불이 확 올라오는 느낌에 제임스는 자기도 모르게 버럭했다.
"가문이고 뭐고 상관없어! 시리우스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니까! 이대로 일이 진행되면 사기약혼에 사기결혼이라구! 그런 일을 당하도록 놔두진 않을 거야!"
로랑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블랙이 임페리우스 저주에 걸린 상태라는 건 우리 쪽에서도 이미 알고 있어. 순혈가문에서 억지 결혼에 흔히 쓰는 방법이지. 불법이지만 순혈가문이 하는 일이니 마법부에서도 되도록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거야. 대놓고 마법부 관리 앞에서 주문을 외우지 않는 이상 간섭하지 않는 거지."
황당해서 눈이 휘둥그레진 피터가 물었다.
"그럼 너나 너희 가족 모두 알면서도 약혼을 밀어붙이고 있단 뜻이야?"
"어차피 이건 거래니까. 블랙이 제정신이면 나랑 결혼하려 들지 않을테니 차라리 지금처럼 넋 빠진 상태인 게 우리로선 편하지."
화가 난 제임스가 다시 버럭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에 리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말하는 '우리'에 사실 너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해. 네가 시리우스와 정말 약혼할 생각이 있었다면 지금 여기 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애초에 호그스미드에 나타나지도 않았을 거야. 시리우스가 어떤 성격인지 이미 조사를 끝냈을 테니 약혼식 전에 만나는 게 역효과만 더할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겠지. 그 구슬점으로 시리우스의 반감을 더 크게 산 것도 그렇고.. 네가 약혼을 깨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느꼈다면 너무 억지일까?"
침묵이 흘렀다. 옆 테이블에서 사람들이 큰 소리로 크리스마스에 받은 선물에 대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자기 앞의 찻잔을 응시하던 로랑이 리무스를 향해 눈을 들었다. 푸른 눈동자가 무섭도록 빛났다.
"거래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게 있지. 시리우스 블랙은 이 거래에서 얻을 게 없으니 거래 자체를 원하지 않겠지만 나는 얻고 싶은 게 있어. 네 말이 맞아. 난 이 약혼을 깨고 싶어. 하지만 조건이 있지. 절대 내 손으로 깨선 안 되고, 최대한 유리한 타이밍에 깨지게 해야 한다는 거야."
"네가 원하는 게 뭔지, 그리고 최대한 유리한 타이밍이 언제인지 물어봐도 될까?"
로랑은 깊은 숨을 내쉬고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난 내 아버지가 이 일로 프랑스 마법사회에서 매장 당하길 바라. 아내를 자기 일에 휘말려 죽게 하고, 큰아들을 정략결혼시키려다 죽인 걸로도 부족해 딸까지 잡으려 들었다며 손가락질 당하게 만들고 싶어. 아버지의 위상이 추락해야 우리 가문에 접근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겠지. 그래서 적어도 내 동생에겐 이런 짓을 못하게 할 거야."
소년들의 얼굴이 확 굳었다. 로랑이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내가 워낙 어릴 때 일이라 기억조차 나지 않아. 하지만 오랜 세월 함께 자란 오빠의 죽음은 데미지가 전혀 달랐지. 오빤 다정하고 순한 사람이었어. 바보처럼 아버지의 명령을 거스르지 않고 모두 따랐지. 하지만 막강한 힘만큼이나 원한 관계가 엄청났던 집안과 연을 맺으려던 아버지 때문에 결국 죽고 말았어.
가족을 자기 손으로 둘이나 죽인 셈인데.. 그런데도 이번에는 날 정략결혼시키려 하고 있으니.. 내가 내 입으로 약혼하기 싫다고 하면 날 내치고 열네 살 밖에 안된 동생을 대타로 삼을 게 뻔해. 그러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약혼을 이용해 아버지를 추락시키는 것 뿐이야. 약혼이 요란스럽고 추하게 깨질수록 좋으니 약혼식 당일이 최고의 타이밍이겠지?"
로랑 역시 약혼을 깨려 한다는 것은 희소식이었지만 그 뒤에 숨겨진 이유를 듣자 세 소년은 절로 숙연해졌다. 리무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런 엄청난 일을 겪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어. 우릴 믿고 얘기해줘서 고마워."
셋의 심각한 표정에 로랑은 미소를 지었다.
"너희 잘못이 아니니 제발 그런 표정 짓지 마. 나도 너희 도움이 필요해. 너희 쪽에서 연락이 없으면 나 혼자서 약혼식을 뒤집어 놓을 생각이었지만 서로 돕게 됐으니 한결 수월해진 셈이야. 호그스미드에서 미리 만난 보람이 있었지. 블랙이 절대 약혼할 생각이 없는 이유를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으니까. 나도 물어볼게. 단순히 친구를 정략결혼에서 구하는 것만이 목표는 아니지, 리무스?"
다 안다는 듯한 로랑의 직설적인 질문에 제임스는 피터와 당황한 눈빛을 주고 받았다. 고개를 돌려서 보지 않아도 리무스의 뺨과 귀가 붉게 물드는 것이 느껴졌다. 짧은 정적을 깨고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맞아. 나에게도 반드시 이 약혼을 깨야 할 이유가 있어."
친구가 더 이상 당혹스러워 하지 않도록 제임스는 목청을 가다듬어 자신에게 주의를 돌렸다.
"좋아. 다들 같은 뜻이니까.. 31일 약혼식을 반드시 깨고, 그것도 아주 요란하게 깨도록 하자구. 그럼 시간이 없으니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계획에 대해 설명할게."
로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를 테이블 쪽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세 소년도 테이블을 향해 몸을 굽혔다.
"우선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는 소식부터 알려줄게. 시리우스의 외삼촌인 알파드 블랙 씨가 우릴 도와주실 거야. 블랙 가 내부에선 급한 경우에 레귤러스의 도움을 구할 수 있을 것 같고.
일단 31일에 우리가 그리몰드 광장에 어떻게 들어갈 건지부터 설명하자면......"
- 37장에서 계속
- 쓰면서도 글이 무진장 늘어져서 한숨이 나오지만 완결이 그리 많이 남지는 않았습니다. 여러 모로 관리 안되는 블로그지만 찾아주시는 분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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